날짜: 2014년 12월 7일
본문: 누가복음 4:18-19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눈먼 자를 다시 보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누가복음 4장 18-19절]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을 만나고 또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멀 때, 자유가 억압될 때, 무언가의 포로가 되어 힘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설명도,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그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페리 노블의 책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가르치려 들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나는 상황을 이렇게 바꾸고 고통을 이렇게 줄이고 싶은데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지 않을 때는 원망이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짓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영화 “스타워즈”의 골수팬이다. 이 시리즈의 여섯 편 모두를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앉은 자리에서 여섯 편을 다 보려면 약 13시간 반이 걸린다. 방금 인터넷을 검색해서 확인했다. 자, 당신이 지금 텔레비전 앞에 앉아 겨우 한 편 중 15초를 본다고 해 보자. 13시간 반짜리 이야기를 겨우 15초를 보고 나서 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스토리가 빈약하니 이런저런 부분을 바꾸라고 말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영화계의 거장 조지 루카스에게 이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렇게 오만하게 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 내가 병원에 가서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 보자. 의사가 내 상태를 알린 뒤 메스를 든다. “암 덩어리를 도려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뭐? 내 배를 가르겠다고?”라며 화를 낸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배를 가르는 고통쯤이 무슨 대수인가.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내게 꼭 필요한 고통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한, 나 자신의 작은 머리로 그분의 선하심을 판단하지 않게 깨우쳐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눈먼 자를 다시 보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일들은 ‘말’이 아닌 ‘실제적인 사건’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 많은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 보지 못하니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겠습니까? 요즘도 그런데 전혀 소경에 대해 배려가 없던 시대에 말입니다. 단순한 불편함보다도 육신적인 ‘결함’을 ‘죄’와 연관해 소외했던 것이 더욱 큰 고통이 아니었겠습니까?
눈먼 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은 단순한 치료의 의미보다는 소외된 삶을 공동체의 삶으로 바꿔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 역사가 영적인 것과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은 우리가 대강절에 묵상하는 본문 말씀의 “다시 보게”라는 말씀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을 못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우리의 시력이 가려졌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관심과 함께했던 제자들의 관심이 달랐던 것을 보여줌으로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대강절’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고 있을 때, 즉 그들이 죄의 원인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고통을 보셨고,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셔서 다시 보게 하셨다는 것이죠.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다시 보게 하도록,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절망적인 소경의 삶에서 새로운 소망을 보셨던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저 사람 “개안했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단순히 피지컬한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가 눈을 뜬 후에 그를 고치신 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눈을 뜨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가 눈을 뜸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일을 요한은 9장 전체를 통해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 트집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의지적 변화”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변화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의 이야기가 우리 신앙에 아주 본질적인 이유는 그런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유’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처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변화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들이 변화보다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유대 사람들도 그랬지만, 불교 국가인 태국 같은 나라에서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타고 난 사람들은 전부 전생의 죄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윤회’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고치려는 의지보다는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족함 자체를 죄로 보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눈먼 사람들하고는 절대 악수하지 마라. 눈먼 사람 가까이에 있지도 말라. 가까이 있다 보면 병에 걸리거나 액운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부끄러움’ 혹은 ‘수치’로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종종 교인 중에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감추는 사람들을 봅니다. 혹은 중직자 중에도 어려운 시절을 지날 때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아파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직분도 있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 봐 두렵습니다. 아니, 자신의 내면의 두려움이 더 큰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대로 그렇게 질병과 어려움으로 심판하신다면 누가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스스로 죄의 감옥에 가두고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만일 그런 자녀의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가장 힘들 때 부모의 도움을 구하고, 그 부모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부모 된 특권과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들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대강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다.”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고, 두 번째의 신앙적 만남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다시 만난 자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원리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고통의 속량(redemtive)”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고통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도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들도록 속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과 야고보와 베드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박해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대입해보면, 그가 앞을 못 보고 태어난 것이 선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의 죄나 아버지의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속량’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며 고통을 피해가지 않고 고통을 통과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럴드 싯처라는 휘트워스대학의 교수는 오래전 아이다호의 시골 지역에서 가족을 태운 승합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술 취한 운전자가 시속 136km로 달리다 커브 길을 미처 돌지 못하고 차선을 넘었습니다. 충돌 후 제럴드는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그의 눈앞에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네 살짜리 딸이 숨을 거뒀습니다. 한꺼번에 3대를 잃었고 살아남은 그의 세 자녀도 중상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다]라는 책을 쓰면서 자신이 당한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사고 후에 직장을 다니며 자녀를 키우는 것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지만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갔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매일 밤 나는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는 지치고 괴로워서 과연 그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다음날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자동차 사고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형벌이라고 느껴졌다. 차라리 죽는 게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제럴드는 두 번째 책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사고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재직하던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이 어떻게 실제로 도와주었는지, 엄마 없이 성장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재혼한 두 가정이 결합하여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에서 큰 도전인지,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re-" 만들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량 받은 것이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많은 대가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상처에서 회복되어도 상처와 기억이 남을 것입니다. 마치 속량 받은 노예의 팔뚝에 그를 붙잡아 놓았던 족쇄의 흔적처럼 말입니다.

속량 받는다는 것이 예전과 똑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과거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절대로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의 아픔을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을 지나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아무리 아픈 상처와 추악한 과거가 있다 할지라고 그 모든 것을 속량하시기 위해 커다란 대가를 지불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대강절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도전이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참으로 아파하고 있다면 그들의 삶을 바꾸고 속량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줄 수 있는 한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 가운데서 ‘속량’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의 삶을 ‘속량’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의 삶에 고통의 이유를 말하고, 잘못을 탓하고 있을 때, 그의 눈에 침을 바른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으로, 그의 삶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던 누군가의 이야기
요한복음 9장에서 일어났던 기적의 사건, 즉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하셨던 일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소망이 되지 않았을까요?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은 바로 그 주님의 오심을 우리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세상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살았던 사람들에게 풍성한 삶의 기대가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기대’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또 다른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신 일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의 말씀입니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죠.
풍성한 삶의 원리가 있으나 누구나 풍성한 삶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나아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께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왕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충분히 불쌍히 여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50절에 보니까,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날씨를 생각할 때 겉옷은 생명과 같습니다. 추운 밤이 되면 자신을 지켜주는 이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의 인생의 무게였을까요? 그것을 내버리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부르심에서 ‘풍성함의 원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음이었습니다.
흔히 바디매오에 대한 본문으로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해석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디매오 스스로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과 환경적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을 들어 말씀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요인과 축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많은 무리가 여리고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었지만, 거리에 있었던 바디매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려고 오셨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나아오자, 아니 그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소리를 지르자, 마가복음 10장 4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참 흥미롭죠?
예수님 주변에 있던 몇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소리를 질러 그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대강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가로막거나 상처 주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디매오 역시 주님께 나아오는데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실망하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좌절할 이유가 충분했을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이 닥치면 우리는 보청기의 볼륨을 올리게 될 것이고,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 역시 그의 삶의 고통 가운데서 보청기의 볼륨을 올리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았을까요? 그가 소리 질러 예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크게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느꼈던 좌절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대학원 과정이 끝나고 깨달았습니다. 영어는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들리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들리면서 말을 하게 된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말이 들리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 인생이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제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간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이라는 미국 목사가 되는 과정 중의 하나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12주 동안 미국의 종합병원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환자들을 돌보는 훈련을 하는데, 영어가 들리지 않는 저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끝나고 자신이 일하고 싶은 파트를 신청하는 때가 왔습니다. 제 고민은 영어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파트에 지원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Labor & Delivery”에 신청을 했습니다. ‘labor’가 힘쓰고 ‘delivery’가 배달하는 덴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아이 낳는 산모가 힘쓰고 아기가 나오는 부서였습니다. 그다음부터 저에게 고난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저에게 유익이 되었음을 지금 이렇게 웃으며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교육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병원은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고 온갖 총기와 마약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어린 10대 임신부가 많이 입원하고 사산을 하거나 유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미국 사람들의 경우에 아이를 잃고 나면 병원에서 사역하는 목사에게 기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아이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말이죠. 그때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적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산모에게 이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죠.
“아이를 잃어서 참 안 됐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죠.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만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죽은 아이의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슬픔에 쌓인 환자들에게 위로의 말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옆에서 함께 아파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그때, 상황에 맞는 기도를 써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안 되지만, 그때 영어로 기도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정말로 아파하는 환자들에게 제가 써온 기도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온 목산데, 한국말로 기도해도 될까요?”
지금 생각해도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기도는 서로 알아듣는 것보다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 주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디매오를 생각하며 저에게 떠오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예수님께서 눈먼 자들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지, 그리고 오늘 대강절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지를 말입니다.

대강절에 거는 기대입니다. 우리가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