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1월 16일
본문: 시편 50:22~23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축복을 받아 감사하시나요? 감사해서 축복을 받으셨나요?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시편 50:22-23]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페리 노블이 지은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보면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장면을 페리 노블은 아주 놀라운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3장 25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왔을 때 타버린 것은 그들을 묶은 결박뿐이었습니다. 불 속에 네 명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살아 나온 것은 셋뿐입니다. 그러면 네 번째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들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불 속에 나온 것은 ‘셋’ 그분은 아직도 불 속에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분이 아직도 불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이.
이사야 43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물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불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불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불을 통과하든 주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가 감사합니다.
감사가 무엇일까요?
축복이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백함으로 소유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축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생 가운데서 늘 만나는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감사하기에는 이 세상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감사를 방해하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올해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라는 면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2013년 미국의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앤디훅 초등학교에서 20여 명의 아이들이 무고하게 죽었습니다. 학교에 침입한 한 청년이 초등학생들을 이유 없이 총으로 난사해 죽였습니다. 아니 교실에 들어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숨어 있던 아이들에게 그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이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이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한 부모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녀와 함께 보낸 6, 7년의 세월의 기쁨이 지금의 이 고통보다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지금까지 함께했던 그 아름다운 시간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영국의 시인 아르레드 로드 테니슨은 젊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해본 적이 전혀 없는 것보다 사랑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을 잃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아픔의 기억을 간직할 수도, 소중했던 사랑의 순간을 기억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단지 그 소중한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에 나오는 짤막한 글을 인용합니다.
“내가 인생의 지극히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리고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감사’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오늘 본문 23절을 보세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말씀의 문맥을 가만히 살펴보면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과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이 별개의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그 사람의 행위가 옳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뜻이죠.
쉬운 성경으로 볼까요?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나를 높이고 길을 예비하는 자이니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줄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는 삶의 행위가 어찌 잘못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의 제사와 그 사람의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제사”란 자신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누구에게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하십니까? 지금 나에게 행한 그 행동이 적절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즉,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제사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소원을 드리는 예배입니까?
아니면 감사를 안고 와서 고백하는 예배입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왜 드리십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무엇을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나요?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를 무척이나 존경한다고 하면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만나기를 사모해 왔다고요. 여기까지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순간에, 그 칭찬과 만남은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또, 우리는 그 감사보다 마음의 소원이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기분을 생각해 보셨나요? 혹시 이러한 일이 몇 번은 괜찮지만, 매번 반복된다고 해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시편 37편 4절의 말씀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감사가 축복이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오늘 그분의 은혜만을 생각하며 마음껏 감사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예배는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을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추수 감사절” 예배가 있습니까? 알면서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 “어버이날”이 있습니까? 어버이의 은혜를 알지만, 매일 달라고만 하고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날이라도 기쁘게 해드리라는 것이지요.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말이 있지요. 부모는 계속해서 베풀어 줍니다. 오늘 속고 내일도 또 속아 줍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그 은혜를 표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참된 예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던 일들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회복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어버이날 선물을 드리고, 용돈을 특별하게 드립니까?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으로 하면 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를 아주 정확하게 알지요.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은혜를 알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만이 자신을 인정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앞으로 인도하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올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10명의 문둥이가 와서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하자, 불쌍히 여기셔서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병이 나은 것에 대한 확증을 제사장에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가는 도중에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감사를 모르고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혹 이들 가운데는 감사를 드리되, 깨끗이 씻고 와서 감사를 드려야 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 감사하려면 격식을 차려야 한다고요!”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논리적인 생각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나음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계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감사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감사는 즉시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자가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절에 대해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분이 빼놓지 않고 들어봤음직한 말씀이 하박국의 감사입니다.
하박국 3장 17~18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감사는 자신이 누리는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수년 전 가이드포스트에는 “Pay a Pilgrim's Thank”라는 간단한 Article이 실렸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도대체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이들은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자들의 은총입니다. 이들은 1620년 110명이 항해를 시작했는데 48명이 죽어서 도착을 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산 자들이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절반의 살아남은 사람들이 1년 동안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보리와 밀을 심었지만,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하고,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도움으로 옥수수를 얼마 정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놓고, 들에 뛰어노는 칠면조를 잡아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린 것이 “추수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Thanksgiving이 되면 어느 가정이든 식당이든 칠면조와 옥수수가 넘쳐납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 추수감사절이 되면 늘 칠면조를 먹었는데 도대체 맛이 없습니다. 고기가 퍽퍽하기도 하고, 아무리 요리를 잘 해도 닭고기만 못합니다. 미국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굳이 칠면조를 먹는 이유가 있다면 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감사절에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감사는 고난 중에 드리는 것이요, 고통을 당해본 자만이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사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만이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너희
그런데 오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감사의 예배를 원하시는데, 감사가 없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이유를 50편 22절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는 바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는 인생의 성공과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당신의 실패 가운데서도 “wonderful picture for you or design for you”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본받는 자가 되어 시류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망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나, 이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따라 엉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교도소에서 믿음 생활을 하며 저에게 보내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분이 저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위로하네요.
열심히 일하는 개미 4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개미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가 열심히 살아온 상으로 소원을 들어줄 테니 개미가 아닌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싶다면 말해 보거라!” 하셨답니다.
첫 번째 개미는, 하나님 저는 늘 큰 덩치의 소에게 밟혀 죽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았어요. 그러니 저는 소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개미는 소로 변했습니다.
두 번째 개미는, 하나님 저는 저 하늘을 훨훨 나는 자유로운 새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새로 변했습니다.
세 번째 개미에게 소원을 묻자, 개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일도 안 하고 마음껏 돌아다니며 먹고 노는 쥐가 너무 부러워요. 지금껏 늘 무거운 짐과 먹이를 등위에 지고 열심히 일했으니, 저를 꼭 쥐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그러자 이 개미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역시 “펑”하는 소리와 함께 쥐로 변했죠.
네 번째 개미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개미는 앞에 세 마리의 개미가 변하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소원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소도 되고 싶고, 새도 되고 싶고, 쥐로도 살고 싶어요. 그러니 저를 한 번씩 다 해볼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그래 개미야! 저의 소원을 들어주마.” 그러자 “펑” 소리와 함께 개미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프랑크 소시지(소, 새, 쥐)가 남았다고 하는군요.

참 바보 같지 않나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축복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이 너무 부러워서 내가 누려야 할 축복을 누리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사오정 같은 인생을 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 사람을 바라봅니다. 중심이 없는 인생은 세상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흔들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이 바뀜으로 말미암아 잊어버린 감사를 말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또 일어섭니다. 그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넘어져도 일어섭니다.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앙적인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면 구하고 기도하면 되는데, 잘못된 믿음을 교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믿음을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나오는 것임에도, 우리는 믿음을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훈련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테크닉을 배우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합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4편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감사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집회에 가면, 순종하는 기도보다는 우리의 바라는 것을 성취하는 것을 대단한 믿음의 성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렇게 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라는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 자들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감사와 반대되는 말이 무엇인가요? “불평” 아닙니까? 여러분은 언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 스스로 만족함이 없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이란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서 얼마나 만족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심이 만족함과 함께할 때 큰 이익이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만족이 없다면 그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얼마큼 하나님을 인정하십니까?
이 불평과 불만이 대개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라면,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외모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만족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렇게나 버려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운동하고 가꿔야 합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도록 해야합니다.
하지만 키가 작은 것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키가 작아서 생기는 불만보다는 장점을 생각해 보세요. 택시 탈 때, 물건이 땅에 떨어졌을 때.
이 불만이라는 것이 자기 열등의식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외모를 가지고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감사를 모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의 감정입니다. 항상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입니다. 내가 실패한 원인을 다른 사람의 성공에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될수록 자신의 삶에서는 감사를 잃게 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이 바로 이런 이유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사람의 제사만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심에 대한 원망이 동생에게 향하느냐는 말입니다.
요즘 가장 많이 나오는 말 가운데 하나가 “블루오션”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레드오션”을 생각했습니다. 치열하게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한 틈새를 찾아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당신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 독특하게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늙을 때는 멋지게 늙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많은 축복을 가지고 있다면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감사란 바로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요, 겸손함에서 오는 것이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성숙은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늘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칭찬하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난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이 아주 무섭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를 생각해보셨습니까?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이 따로 세워지지 않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감사를 모르는 삶 자체가 얼마나 큰 형벌입니까?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오늘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도 감사가 넘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생각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자녀 중에 혹은 손자, 손녀 중에 어떤 자녀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대답이 간단하지요. 순종하고 말 잘 듣는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습니까? 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사무엘 상 15장 22절에 나온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예배에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시간과 물질이 아니라 “순종의 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기를 바라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임을 믿는 사람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순종하는 사람 말입니다.
시편 37편 31절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119편 11절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사람은 실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범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감사를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감사하십니까?
하나님께 순종한 삶을 인한 감사가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 앞에서 꺾인 것으로 말미암은 감사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것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이 왜 복이 있습니까? 왜, 그런 사람들에게 시온의 대로가 열립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감사할 수 있는 그것이 축복으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시온의 대로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고, 주를 찬송하는 그대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감사의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당신의 삶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지금까지 함께하신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당신을 향한 삶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축복의 사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그대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죠. 주님 그대를 너무 기뻐하시죠.
주의 집에 거하기를 사모하고 주를 항상 찬송하는 그대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죠. 주님 그대를 너무 사랑하시죠.
그대 섬김은 아름다운 찬송 그대 헌신은 향기로운 기도
그대가 밟는 땅 어디에서라도 주님의 이름 높아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