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석 목사(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불경건은 ‘리쉬아트()’인데 명사, 여성, 단수, 연계형이고, 어근은 ‘라샤()’인데 불경건하게 행하다, 유죄를 선고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경건하게 행한다는 말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가 잘라져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은 머리를 바꾸게 하는,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다. 하나님은 육안으로 보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머리와 얼굴로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 사상, 정신, 생명이 하나님의 머리와 얼굴이시다. 반면에 인간의 머리와 얼굴이 있다. 물론 현상적인 머리와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가 깊음(무저갱)의 얼굴들이 되어 본래적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우상이 되어 왔다.

육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이 우상에 종속되어 복종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신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인 무저갱의 얼굴들을 잘라내고 하나님의 머리와 얼굴로 바꾸시는 데 목표를 두신 것이다. 우상인 무저갱의 얼굴들을 잘라내고 죽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머리로, 얼굴로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있다. 현상의 천지만물은 창조주의 한 번의 창조하심으로 완성되었지만, 인간은 재창조를 해나가야 한다. 본래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무저갱의 얼굴들을, 계몽을 하고 개간을 해서 잘라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재창조를 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재창조는 일평생 삶을 통해서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이루어져 가게 된다. 아니 일평생 삶을 통과하기까지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잘라내야 할 무저갱의 얼굴들인 육의 속성이, 죽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반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에 대한 개념이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경은 죽음에 대해 육신의 목숨이 죽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있다. 성경은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와 얼굴이 잘려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나는 죽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얼른 죽지 않아서 고민”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죽는 것을 너무 어려운 개념으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 우선적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전까지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앉아서 우상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비교하고 분별을 하여, 내 생각은 잘라내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대체시켜야 한다는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무저갱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죽어야 할 생각들을 우상으로 섬기고 종노릇하며 살아 왔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데에 있다.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속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양육해서 완성시키는 말씀인데, 현상적인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문자대로 읽으면 속사람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인데, 인식을 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지금까지 읽어 내려왔고 신앙생활을 하여 왔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생각을 바꾸라는 말인가? 틀렸으면 틀린 대로, 개념이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대로 여태껏 신앙생활을 해온 대로 해나가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왜 믿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묻고 싶다.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어두움인 무지의 생각의 옥에 갇혀서 안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밑에서 사람의 잣대에 갇혀 있던 것을 사모하였던 것과 똑같다. 하나님의 잣대이든 하나님의 왕국이든 필요 없고, 사람의 잣대인 바로 밑에 여태껏 갇혀 있었던 곳에 그대로 안주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육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잣대인 하나님의 머리와 얼굴로 바꾸는 훈련이 너무 힘들다는 불평이다. 앞으로의 소망이 무엇이든, 지금 편해야겠다는 것이다. 머리를 바꿔서 구원받을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경건이다.

그 다음 불의는 ‘아발()’인데 불의를 행하다, 왜곡하다, 옆으로 빠지다는 뜻이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첫째 시기, 둘째 시기, 셋째 시기가 하나님의 얼굴들이신데, 넷째 시기, 다섯째 시기, 여섯째 시기인 마음땅에 적용해서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잘라내지 않고, 사람의 잣대를 만들어서 무지를 잘라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해서 빗나가는 것이 불의다. 사람의 생각으로 의로워지고자 왜곡된 행동을 하는 것이 불의다. 의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잣대가 의다.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고난을 통해서 깨트리고 잘라내 소멸시켜서 재로 만드는 것이 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두움인 무지가 완전히 소멸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 바뀌는 것이 의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로 바뀌는 것이 의다. 말은 좁은 길인 의의 길로 걸어간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과 행동은 넓은 길로 빗나가 있고 좁은 길을 왜곡시키고 있다.이들의 불의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사역을 해나가는 진리를 진행되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다. 이들의 불경건과 불의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들에서 스스로 나타나게 된다.

진노는 ‘하론()’인데 진노, 격노, 화를 뜻한다.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머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람의 잣대로 갔다왔다 하는 불경건과 육의 속성에 안주하면서, 얼굴들이 깨트려지는 것을 모면하려고 하나님의 잣대에서 벗어나서 도망치는 자들의 불의를, 하나님께서 방관하시고 계실 리 없다. 진노는 첫째 시기에서 셋째 시기인 하나님이 의도하신 법으로 넷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인 마음땅의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무저갱의 얼굴들을 생명의 머리와 얼굴로 바꾸시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하늘들의 불로 태우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을 변경하시지도 포기하시지도 방관하시지도 않으신다.

반드시 불로 태우셔서 의도하신 바를 성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시다. 현상적인 천둥·번개를 치며 낙뢰가 떨어지게 하셔서 공포감을 주시는 것이 진노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하나님, 낙뢰가 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하였었다. 사람의 잣대인 어두움인 무지의 길을 가는 자들은 불태워져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불태워지는 진노를 불러들이게 하는 자들이다. 불경건과 불의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의 머리가 되도록 불태우시는 진노를 영접하는 행위들이다.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은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죽게 되면, 불못에 들어가 다 태워지지 아니한 불경건과 불의를 완전히 태워 소멸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피조물인 인간은 피하거나 면제받을 수 없다.

서균석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교회(통합) 담임목사 은퇴
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문의: 010-3728-0245
홈페이지: http://www.koreahebr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