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0월 26일
본문: 고린도전서 11:23~26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2세대 독일의 필립 멜란히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온유한 개혁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깨달음!”
종교개혁가 중에 제일 개혁적이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루터의 유적지에 가면 늘 루터와 함께 서 있는 인물 멜란히톤입니다. 루터의 뒤에서 도우며 싸움보다는 중재를 시도했던 인물이죠. 루터가 죽은 후 당연히 리더가 되어야 했음에도 너무 유약하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개혁자임에 분명한 것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잘못된 중세교회의 권위와 교황권을 비판했다는 것이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있어도 “옳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없다는 것.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해 핍박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멜란히톤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배척당하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세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끝까지 접촉점을 찾아보려 했던 그에게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불의에서도 사랑하면 온유해지리라.
사랑하면 핍박하기보다는 핍박받는 쪽을 택하리라.

이곳 유럽에서 열어본 네이버 검색 1위가 ‘사랑의 교회’ 연관 ‘서초교회 잔혹사’가 뜨더군요. 수없이 붙어 있는 댓글 때문에 마음이 더욱 힘들고요.

정말 교회를 사랑함은 무엇인지?
여기에서 온유함은 무엇인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무엇인지?

이 시대에 루터도 필요하지만, 멜란히톤이 필요한 시대는 아닌지.
뭐 복잡하지만, 복 있는 사람을 묵상하며 숙소에 있습니다.
정답은 모르겠지만,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군요.
요즘 글이 너무 길어지는 듯하여, 내일 이어서 멜란히톤의 이야기를 이어가렵니다.
복 있는 사람 되려 애쓰며 생각하는 하루가 되기를.

멜란히톤은 루터와 동시대 인물로 그의 동역자로서 또한 루터의 신학사상을 체계화한 2세대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멜란히톤은 1497년 2월 독일 남부 팔츠 지방의 칼스루해 근처의 브레텐(Brette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천재적인 학자로 알려졌는데, 12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수사학 그리고 천문학 등을 배웠고, 무엇보다 헬라어 학자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1511년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고 15세인 1512년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석사 학위를 거부당하자 튀빙겐 대학으로 옮겨가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17세에 석사학위를 받고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21세 때인 1518년 헬라어 문법책을 출간하였고 그 책은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교과서로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1518년은 그가 21살의 나이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헬라어 교수를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1518년은 루터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초조하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뒤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어 와 있었던 때 그는 초조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어린 교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죽는다면 후회는 없다네. 그러나 그대와의 말할 수 없이 달콤한 교제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네.”

루터가 죽음보다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했던 이 젊은 교수. 그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필립 멜란히톤이었습니다.
멜란히톤은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로 상징되는데, 독일의 루터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 앞에 가면 루터 동상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또 하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동상이 바로 멜란히톤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 하면 루터나 칼빈을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 옆에서 도왔던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멜란히톤입니다.
루터는 멜란히톤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칭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멜란히톤은 루터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기초한 인물입니다.

역사가들은 루터에게 멜란히톤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석학이었던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52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루터에 대해 104가지 조목으로 정죄했을 때, 루터 측에서도 반박이 필요했고, 이때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던 사람이 멜란히톤이었습니다. 
멜란히톤은 1521년 ‘신학강요’의 초판을 발행합니다. 이 책은 그가 해왔던 로마서 강의를 발전시킨 작품으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이 됩니다. 그는 성서에 기초하여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을 옹호했고, 이 책은 루터교 신학의 최대 걸작이자 루터주의 신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처럼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했고,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란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학자나 대학 행정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죠. 그는 새로운 교육 헌장을 만들고 교재, 교과목의 새로운 편성 등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육개혁은 독일 전역의 대학에서 받아들여져 학생들은 그를 ‘독일의 스승’이라 부르게 됩니다.

멜란히톤의 삶과 사상을 보면서 그가 종교개혁가라고 하기에는 좀 온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참 힘든 것이 “옳음”과 “온유함” 사이에서 무엇이 그리스도인다움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페북에 올라온 한 후배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서 맞는 첫해, 건방졌던 저는 합리적이지 않으면 무엇에든 대들고 부딪치곤 했습니다. 하루는 윗집이 이사를 들어오는데 무려 밤 11시가 되도록 계속 쿵쿵대는 소리에 마구 화가 났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뭐 이런 경우가 있느냐며 먼저 화를 낸 저는 윗집에 올라가서 항의하려고 문을 열던 차였습니다. 그런 저를 간곡히 붙잡으며 아버지가 타일렀습니다. 우리가 조금 불편하면 되지 않느냐고? 저기 이사하느라 얼마나 힘들겠냐고? 아버지의 따뜻한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씩씩거리던 불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적립되어야 할 포인트를 놓친 건 아닌지, 할인 카드를 사용하지 못한 건 아닌지, 쿠폰을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늘 생각해야 하는 왠지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리에 밝고 권리를 외치고 조금이라도 시비가 생기면 지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삶이 힘들죠? 내게 좋은 삶을 사는 건 참 치열합니다. 온유함은 남에게 좋은 것을 주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 손해보고, 조금 불편하고, 조금 져주면 그 온유함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치유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메이카의 한 선교사님이 팔복 중의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를 가르치면서 "당신들의 말속에 온유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해석합니까?"하고 물었더니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사나운 물음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차가움이 성난 불을 끄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거친 불을 가라앉게 합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맘이 그리운 추운 가을날입니다. 모두 따뜻한 날 되시길.

멜란히톤 시대에는 많은 반목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1530년 황제 카알 5세가 종교 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했지만, 사실은 반종교 개혁적 태도를 버리지 않은 때입니다.
이때 나온 “프로테스탄트”라는 말 역시 좋은 의미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불린 말이기도 합니다.
황제는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 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했고 제후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일단 물러나는 듯했지만, 또 제2차 스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앞선 결정을 철회하고, 종교개혁을 억제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신교와 구교 측의 ‘올바른 신앙’에 대한 논쟁은 제국의 분열을 위협했고,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 화해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황제와 루터 사이에 멜란히톤이 있었습니다. 이때 루터는 모든 법적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라 코부르크 성에 갇혀 있어야만 했기에, 멜란히톤이 협상에 참석하게 됩니다.
황제는 신·구교 양측에 신앙고백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멜란히톤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신앙고백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해 몇 번의 수정 끝에 제출하게 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총 28개 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1조에서 21조까지는 종교개혁가들의 신앙과 교리를 기술했습니다. 22조에서 28조에 이르는 둘째 부분의 나머지 7개 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에 담긴 루터의 성만찬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측 내부의 분열을 담고 있는데, 루터는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그것을 상징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가 갈리게 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스위스를 대표하는 츠빙글리는 제국의회에 ‘신앙의 원리’를 통해 자기 뜻을 밝히게 된 것이죠. 사실 멜란히톤도 루터의 성만찬설과 다른 입장이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중요한 역할은 분열보다는 일치 쪽에 강조를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나중에 루터와 갈라섰지만, 성만찬에서 루터를 따르려 했던 노력이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하여 사람들은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용기 있게 나가서 싸울 투사를 원했던 것이죠.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멜란히톤은 끝까지 영웅보다는 조력자의 길을 갑니다. 그는 루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고, 처음부터 자신의 의무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분열을 막는 것으로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전술과 외교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황제에게 호의적인 어법을 사용했고, 루터의 교리가 보편적인 가톨릭 교리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우유부단하고, 너무 타협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루터가 협상 과정에서 너무 양보를 많이 했다고 멜란히톤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입장을 끝까지 두둔하고 신뢰했다.
“나는 멜란히톤이 쓴 변론문을 다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더 고치거나 수정할 것이 없었다.”

루터는 종교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루터 사후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당연히 멜란히톤이 올랐어야 했지만, 멜란히톤이 슈말칼덴 동맹 이후 종교회담에서 보여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로 루터파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멜란히톤이 순수 루터파와 관계가 악화된 결정적 계기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잠정안(Leipzig Interim)에 그가 동의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신앙을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본질적이라 변할 수 없으나, 예배 의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과 관례도 수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쪽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radical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조건 과격하게 바꾸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며,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분열해서 편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본질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1588년 작센의 선제후는 예나대학교를 신설해 멜란히톤에 반대하는 신학을 세우게 되고, 이로써 순수 루터파와 필립파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멜란히톤은 루터파로부터 배척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론서는 루터교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이 되었고, 루터파의 일치서에도 포함되었습니다. 멜란히톤의 신앙고백서는 영국 성공회의 39개 조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는 1560년 사망해 평생 존경과 사랑을 보냈던 루터의 묘 곁에 묻혔습니다.
죽기 직전에 멜란히톤에게 누군가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니 내게 더 이상 묻지 말기를!”


Radical Confession - 성만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멜란히톤은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신학적 토대를 잘 만든 사람입니다. 특히 종교개혁사에서 “성만찬” 논란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성만찬에 대하여 소위 “화체설”을 주장하여 그 떡과 피를 나누어주는 사제의 권위를 더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만찬에서 남은 떡과 포도주 역시 사제들만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만찬의 논쟁은 권위주의적인 교황권에 대한 싸움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성만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세워질 듯합니다.
멜란히톤은 그의 책 [신학총론]에서 주의 만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권이 사제들에게서부터 베풀어지는 의식에 중점을 두면서 성직권을 강화했다면, 개신교는 의식과 사제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의미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식을 통해서 “신앙을 기억”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신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4절과 2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그리고 잔을 나눠주시면서 동일하게 반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기념하라!”

이 의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통해 우리가 다른 공동체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멜란히톤은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을 세례와 함께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와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바라보며 이교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우리는 아주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글을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무엇이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성만찬에 대하여 지적하는 동시에 어떻게 성만찬에 참여해야 할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본문 바로 전에 있는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만찬을 잘못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의미가 아닌 배를 채우려는 사람, 그리고 술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만찬이 제정되고 시행되어야 하는 기준은 “공개적이고 존중할 만한 모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행사 때 하는 “애찬식”과 “성찬식”은 조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과 권위 중심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하지만 꼭 있어야 하는 권위와 전통은 존재합니다. 물론, 중세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지나친 권위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베푸는 물을 들고는 그 물이 마치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그 물로 세례를 베풀면 병자가 낫는다는 주술적 의미 같은 것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앙은 그 어떤 우상도 거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형상을 ‘송아지’로 만들어 숭배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행위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와 성찬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주지만, 그것 자체를 신격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존중하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 때문입니다.
간혹 우리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성만찬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성만찬을 거행하는 사제의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시도 말입니다. 성만찬이 마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떡과 포도주를 숭배하게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직자는 단지 그 직무에서만 거룩한 것이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만찬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고, 이 죄인이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인간임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멜란히톤은 오늘 본문 중에서 “이는 새 언약의 잔”이라는 말씀에 주목하여 성찬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즉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참된 신앙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삶에서 새 언약이 시작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죄로부터 돌이켜서 그리스도에게서 위로를 얻고 그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념하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기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 죽으심 때문에 내가 새롭게 되었고, 새롭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만찬 시에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추억입니다. 그 추억을 되새김으로 생생하게 믿음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흘려주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성찬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성례전을 행할 때 세례를 받는 자에게 성찬이 허락되는 것은 이 믿음의 유무 때문입니다.
사실 세례가 완전한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이런 신앙고백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할 때 세례의 유무를 구분하지 않고 베풀고 있습니다. 단지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그 고백에 동참한다면 참여하고, 나는 그 고백이 동참하지 못한다면 성만찬에 참여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멜란히톤은 성만찬의 어떠해야 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공동의 참여로서 우리는 우리의 한 분이신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서로 우정과 사랑과 신실함과 도움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 의무에 대해서는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가 한 떡에 참여하므로 한 몸이라”(고전 10:17)고 한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 후에 형제의 양심에 손상을 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순간 영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참여한 한 형제와 자매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 번째, 누가 이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8~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보면 그 기준이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악 가운데서 살면서 회심하지 않는 자, 즉 자신을 살피지 않는 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기대하지 않는 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난해 11월 말경에 순복음 교회 문제로 세상이 참 시끄러웠습니다.
제가 이런 글을 썼던 기억이 나네요.
"두렵습니다!" 요즘 순복음교회 문제로 무척 시끄럽습니다. 목회자의 집안에서 자라나서 목회자가 된 저에게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로 얼마나 허황된 소문이 있는가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순복음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진실이냐 오해냐를 따지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어제 우연히 순복음 교회와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보고. 그 기사에 놀란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댓글을 단 내용에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조롱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렇게 교회가 무너져 가느냐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은 저로 하여금 목회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생각마저 이르게 하더군요. 목회자인 것이 창피해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그런데 문득 떠오른 것이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방인 골리앗의 말을 들으며 왜 나가서 싸우려고 했는지 말입니다. 아마도 저는 숨어서 골리앗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 너무 요원한 일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나갈 때 사람들이 조롱했던 것만큼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기도하며 목회를 다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것이 두려웠고, 내 목회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지금 마땅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 묻습니다. "하나님 나 어떻게 하죠? 어떻게 목회하죠?" 부끄럽고 두렵고. 하나님을 향해 조롱하고 교회를 향해 조롱하는 저들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참 많이 싸워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는지. 혹시 오해하지 말기를, 지금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덮거나 모르는 척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회개와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야 합니다. 순복음과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댓글에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군요. "저 개독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다면 저렇게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오늘 아침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렵습니다. "하나님 정말 계시나요?"

성찬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성찬이 회복된다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며 그 거룩함을 생각하고 회복된다는 것 말입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하며 믿음의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언약에 들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