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0월 26일
본문: 골로새서 3:12~17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아름다운 입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에게도 같은 뜻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골3:1) 하며 그러기 위하여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며 비유적으로 옷을 입고 벗는 일로 그리스도인 됨을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2:11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했고, 3:8-10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옷 입으라는 말을 합니다.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성별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별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며 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친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선을 행하되 선행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라도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춤과 섬김의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와 "오래 참음"은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하는 옷은 더 있습니다. 본문 13-14절을 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말하는 옷은 불만을 품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서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생각하며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 대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며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 못할 일, 용서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입을 새 옷들인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는 모두 사랑과 깊이 연관된 덕목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합쳐 한 마디로 말하라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하는 말은 사랑이 그 덕목들과 나란히 오는 또 하나의 덕목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모든 것은 진정 사랑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들이고 사랑의 동기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 가치 있는 덕목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한 말의 뜻이 그것입니다. 띠도 의복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속옷, 겉옷, 상의, 하의 등 여러 가지 옷을 입고 마지막에 띠를 매야 의상이 완전히 갖춰지는 것입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들이 제 자리에 있게 되질 않습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셔츠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오게도 되고 블라우스가 스커트 밖으로 삐져나오기도 하는 등 옷매무새가 금방 흐트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가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덕목들이 오히려 위선처럼 흉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계속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기서 "주장한다"는 말은 운동경기에서 심판의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모든 선수에게 꼭 같이 적용되는 경기규칙을 가지고 경기가 바르게 치러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것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런 저런 사고와 이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해와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나 다 마음에 간직하고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멀리 떨어진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들끼리 다투고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진정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강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완전한 복장을 갖추고 서로 평강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본문 16-17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즉 그가 누구이시며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한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풍성해야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풍성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잘 가르치고 바르게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혜로 가르침과 권면을 서로 나눌 때 공동체에 평강이 깃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친다"은 진리를 질서 있게 나열하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면"은 가르침과 달리 추상적이거나 신학적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입니다. 권면은 가르침을 그것을 듣는 사람의 삶 속에서 강화하며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가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1:28에서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쓴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새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은혜롭고 지혜로운 말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세 가지 말은 의미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그래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시"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송"은 축제일에 부르던 노래였지만 오늘날의 일반적 찬송과 같이 된 것이며, 신령한 노래는 말하자면 오늘날의 복음성가 같은 기타의 곡에 해당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종류의 찬송은 고대 교회의 예배음악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찬송이든 메시지가 전달되는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형식의 찬양이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르침들과 권면들을 잘 암기하도록 돕는 방법의 하나가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은 교회의 예배와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앙을 노래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도 대부분 노래로 표현되었습니다.
가르침과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또 다른 점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에 감사하는 마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서 일어난 모든 변화와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음을 깨달음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입으로만 부르는 찬양,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찬양은 그냥 노래이지 찬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만큼 가르치고 권면하는 효과가 큰 것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은 오늘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삶은 말과 일 모두에 관계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복 있는 사람 된 이들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삶을 살며 그처럼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권능을 의지하며 그의 뜻에 합치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도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의 뜻은 또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지체들이고 그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말입니다. 아름다운 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옷 입는 것을 비유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덕목을 말했습니다. 그 위에 마지막으로 맬 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 험하고 거짓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이 상스럽고 악의에 차 있으면 옷이 아깝다는 말밖에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입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늘 참되고 선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말도 사랑에 넘쳐야 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찬양예배 때 설교하신 목사님이 설교 중간에 흥미로운 동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MBC방송에서 방송된 내용의 일부였는데 꼭 같이 투명한 유리그릇에 꼭 같이 지은 밥을 담고 뚜껑을 닫은 후 여러 사람들에게 두 병씩 나누어주면서 부탁을 했습니다. 한 유리그릇에 대고는 수시로 좋은 말을 해주고 다른 유리그릇에 대고는 수시로 나쁜 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그렇게 하고 나서 두 유리그릇을 다 수거했는데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좋은 말만 해준 유리그릇의 밥에는 곰팡이가 피긴 폈어도 엷은 색깔의 곰팡이가 보기 좋게 피었고 나쁜 말만 해준 유리그릇의 바에는 시커먼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핀 것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의 실험결과였습니다. 생명체가 아닌 쌀밥도 나쁜 말에는 보기 흉하게 반응한다면 하물며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의 쓰는 말이 날로 험악해지고 사나워집니다. 익명성을 악용하는 네티즌들은 너무나 쉽게 타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언어를 마구 쏟아냅니다. 그것은 결국 이 사회를 흉하고 험악하게 만들어 그 피해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당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국회의원이라 하는 자들조차 대통령을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한심한 우리의 세태입니다. 나라와 민족성을 망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순화도 우리가 힘써야 할 급선무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앞장서고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거창한 개혁의 구호를 외치는 것 말고 언어를 순화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늘 힘써야 하는 개혁의 하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