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모리슨 기념당. 침례회 그래브스 목사가 1856년 오선문 근처에 세운 선교 사무실이 후에 광저우 기독교청년회(YMCA)가 되고, 모리슨기념당으로 불리다가 철거된다.

중국의 5천년 역사를 둘로 나눈다면 몇 년을 기준으로 할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을 꼽는다. 천자의 나라가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그 시기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그만큼 의미가 깊고 조심스럽다.

지금까지 중국 최초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의 성경 번역을 시작으로,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 행한 광둥의 여러 선교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그동안 선교사님별로 혹은 사역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전체적인 흐름을 보기로 한다.

역사의 흐름을 탄 선교 역사 연구

▲중국 내 북미장로회의 선교 역사를 소상히 알려준, 기남대학 안소화 박사학위 논문.

2008년 필자의 광저우 선교 역사에 대한 관심은 선교유적 현장 답사로부터 시작되었다. 호기심과 의문은 자료 수집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연구 수준으로까지 진행되었다. 또 현장 답사가 거듭되면서, 선교 역사의 일부가 양파처럼 한 껍질씩 벗겨졌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우연치 않게 또 다른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자료에서나 유적지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사실 서구 선교사는 중국 내에서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기 때문에,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1979년부터 ‘세계 종교연구’라는 잡지를 발간해 왔지만, 서구 선교사에 대한 논문은 1990년대 중반부터 몇 편 찾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 중반부터 기독교 선교 역사와 관련된 중국 내 석·박사 논문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그 중에서 광저우 기남대학교의 안소화(颜小华) 박사가 쓴 2006년 논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광저우시 정부 차원의 종교개방 정책도 선교 연구에 있어 촉진제가 되었다. 우선 선교 유적지를 방문하는 일이 용이해졌다. 기독교 관련 유적지 곳곳에 반가운 안내판이 세워지기도 했다. 외국에서 올 손님들에게, 종교와 문화에 대한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물어 물어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시 정부의 조직 변화도 있었다. 시민의 종교 활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광저우시 정부에 광저우 민족종교사무국이 2009년에 만들어졌고, 2011년 7월부터는 ‘광저우 민족종교’라는 계간 잡지도 창간하여 시민의 종교 문화들을 적극 발굴하고 있다.

삼자교회 협회인 광저우기독교협회는 2012년부터 협회 홈페이지(www.gzchurch.org)에서 과거 그들의 기독교 역사와 다양한 논문들을 정리해서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종교 정책에 힘입어 자료 접근이 훨씬 쉬워졌다. 선교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힘들게 찾아야했던 자료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정치적인 편견도 많이 줄었고 서구 기독교의 선교가 중국 문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결론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정치인으로만 부각되어 온 손중산 선생의 인생 역정이 기독교에 기초했다는 사실도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다. 또한 광저우는 중국 대륙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지역으로서의 자부심도 엿보이고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선교사 파견을 주도했던 미국 측의 자료들은 비교적 풍부했다. 공산당 정부 성립과 동시에 철수해야 했던 선교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1970년대 말 중국 개방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 논문과 책자 발간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1백여 년이 넘은 자료들도 북미장로회 등 각 교단들과 예일대학 등 학계의 필요에 따라 영인본이나 전자 책자로 출간되었다. 1백년 전의 역사를 통해 중국을 다시 이해하려는 미국인들의 집념과 의도가 엿보인다. 관심의 깊이만 있으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상황이다.

▲광탑가는 고대부터 광저우의 외국인 지정 구역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 현존하고 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비단 광저우가 있는 광둥성만의 변화는 아닐 것이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 기독교의 변화도 이 궤도 속에 있다.

대륙 복음의 장정

2014년 2월, 언론에 ‘국가 종교정책의 해금으로 전환(国家宗教政策转向开禁)’이라는 뉴스가 떴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종교는 신앙의 자유를 지지하는 헌법에 의거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가정교회에 대해 취했던 박해를 정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감시하기보다는 기독교 교회를 배양한다는 것이고, 기독교를 중국의 정신문화 자원의 하나로 인정하겠다는 전향적인 정책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향후 중국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위한 결단이라 생각한다. 희망을 품고 지난 세기 중국 복음화의 장정을 되밟아 본다.

중국에는 19세기 이전에 이미 기독교가 세 차례에 걸쳐 전해진 바 있다. 세 차례의 기독교 전래에 있어 광저우가 예외가 된 적이 없었고, 흔적들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7세기인 당나라 때는 경교인 네스토리아파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왔다. 당나라 때도 광저우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항구였다. 당시 광저우의 광탑가(光塔街)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정 거리였다.

일본인이 쓴 당나라 경교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경교 예배당이 광둥성 내에만 51곳이나 있었다. 그중 광저우 광탑가 주변에 47곳이 있었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온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광저우에서 마노(玛瑙) 장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의 흔적이 마노항(玛瑙巷)에 남아있다. 부근에 중국 내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도 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13세기인 원나라 때에는 마르코 폴로에 의해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명나라 초에 선교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명나라 말기인 16세기에 다시 천주교가 들어왔다. 한때 신도가 30만이나 되었다. 광둥성 상천도(上川岛) 북쪽 해변 언덕에 작은 예배당이 서 있다. 이 예배당은 프란치스코 묘원(方济各墓园) 교회로, 예수회 선교사이며 예수회를 창립한 7명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를 기리는 예배당이다. 그는 중국에 온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대 경교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서안에 있는 대진경류행 중국비.

그는 1541년 로마 교황청과 포르투갈 국왕의 명을 받아 동방 선교를 수행하게 되었다. 1542년 인도 고아에서 1549년부터는 일본의 가고시마 현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펼쳤다. 1551년 온갖 어려움을 뚫고 말라카에서 이곳 상천도에 도착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아, 상천도에서 기다리다가 이듬해 11월 열병으로 낯선 이국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후에 바티칸 교황청은 그를 성인으로 봉하고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비석에는 강희년(康熙年)이라는 비문만 남아있다.

그가 죽은 10주 후 교회 신도들이 관을 파서 인도 고아로 옮겨 안장했다. 이장하던 중 그의 시체가 썩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라카를 거쳐 인도 고아 예수당으로 안장했다. 수백 년 후 다시 검사했을 때도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썩지 않았다고 한다.

광둥성 상천도는 그가 순교 후 바로 묻힌 곳이라 로마 교황청에서 성지로 여기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상천도에 작은 초가 움막을 짓고 임시 예배당으로 썼다고 한다. 1700년 광둥 당국이 동의하고 프랑스 국왕이 출자해 ‘프란치스코기념예배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상천도 교회는 1869년에 완공된 예배당의 모습 그대로이다.

중국 대륙 최초의 천주교 예배당 또한 광둥성에 있다. 광둥성 조경(肇庆)시 서쪽 강변에 남아있는 선화사(仙花寺)이다. 이름을 보면 교회 같지 않지만 1583년 9월10일 25세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조경으로 들어와 최초로 설립한 수도원이자 예배당이다.

마테오 리치는 조경에서 6년간 머물며 중국어, 중국 문화를 익혀 ‘중국을 빌어 중국을 변화시킨다’는 선교 기반을 준비했다. 명청 시대 조경은 양광 총감독부가 있었던 곳이라 서양인들이 반드시 중국을 들어오면 거쳐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청 왕조에 들어와 중국 전통과 천주교 교리 간의 불일치가 일어나, 1724년 강희제 때 서양인의 중국 선교가 전면 금지되었다.

▲광둥성 상천도에 남아있는 천주교 중국 최초의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기념하는 예배당.

19세기 이후 중국 선교는 개신교가 주도했다. 당시 개신교는 서구 국가들의 자유무역 열풍에 발맞추어 인구가 많은 인도와 중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강한 기운이 일었다. 중국이 비중국인을 모두 오랑캐라고 했듯,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아시아인들을 이교도들이라 여겨, 진정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