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특별한 직분을 받았다(고후 5:18). ‘그리스도의 대사’(ambassador)라는 직책(고후 5:20)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화해의 직분’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전도의 지상명령과도 관련이 있다. 곧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요 21:16),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등은 모두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하고 있다.

화해자로서의 직분을 맡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점이다. 우리들 모두는 1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모두 탕감받았다. 이제 우리들의 과제는 내 앞에 서 있는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는 것이다(마 18:21-35).

이웃을 향한 사랑과 용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이웃의 무리한 요구라 하여도 넓은 마음으로 용납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방법이다(마 5:39-41).

우리들이 실천하는 작은 용서와 화해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더 큰 화해로 이끌어 들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들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도 하나님과 더 큰 화목을 이루게 할 수 있다.

화해의 영역은 얼마든지 넓혀갈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는 그런 화해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극단적 민족감정을 넘어선 것이다. 그것으로 이방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며, 바울의 활동 무대가 마련되었다. 오네시모와 본 주인이었던 빌레몬의 관계 회복은 신분의 벽을 넘어선 경우이다. 비록 종과 주인이라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 격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로 용납된 것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임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내 양을 먹이라” 당부하셨다. 여기에서 ‘내 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는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의 척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화해의 범위도 넓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