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진 게다.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이 안고 있던 부패와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 날카로운 창을 던졌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지만. 그게 종교개혁의 불을 댕겼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어느덧 130년이 되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점검해 봐야 한다. 성장이 성숙을 이루는 건 아니니까. 교회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교회는 다퉈왔다. 불법과 편법도 불사하면서. 강단을 왜곡시켜 가면서.

어둠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하려 하기보다, 교회 내분으로 진통을 앓고 있다. 담임목사와 원로목사와의 갈등. 담임목사와 장로와의 분쟁. 교회 안의 다양한 파벌과 다툼. 이미 도를 넘고 말았다. 세상이 교회를 비웃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수치를 당하고 있다.

질문하고 싶다. ‘과연 한국교회가 이래도 되는가?’ 교회 돈, 노회 돈, 총회 돈은 눈먼 돈이라고 한다. 누가 어떻게 해먹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만 가면 해먹으려고 혈안이 된 자들이 있다. 그러니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돈을 쓰더라도. 무리를 해서라도. 과연 그래도 되는가?

많은 교회들이 통제되지 않은 재정 남용으로 진통을 앓고 있다. 담임목사로서 적절한 재정 운용은 필요하다. 재정이 뒤따르지 않을 때 큰 일을 하기도 힘들다.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일수록 쓸 곳이 많을 것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필요할 때 돈줄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투명하지 않은 재정 남용은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교회가 정치나 기업을 향해 할 말을 잃게 된다. 교회 재정을 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용해서는 안 된다. 드러낼 수 없는 재정이라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심심찮게 방영된다. ‘교회 세습, 목회 대물림’ 현장들이. 교단적으로도 목회 대물림에 대한 시시비비가 일어나고 있다. 이미 일부 교단에서는 목회 대물림 금지를 위한 법을 마련했다. 어떤 교단은 철회 내지는 연기했다. 정말 묻고 싶다. 복음의 빛을 흐리게 하면서도 목회 세습을 해야 하나? 교회의 영광을 가리면서도 교회를 대물림해야 하나? 세상 소리에 교회가 왜 끌려가야 하느냐고 스스로 위로 삼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게 말하는 이가 개척교회 목화자라도 목회를 대물림하려 할까? 사례도 받지 못한 채 목회하는 농어촌 교회라도 세습을 하려 할까? 만약 대형교회이기에 목회 세습이 비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조금만 더 정직해 보면 어떨까?

종교개혁은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본이 사라진 한국교회. 왜 이 지경이 되고 있나?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말씀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을 재는 잣대로만 사용하려는 게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의 잣대를 갖다 대지 말고, 자신을 재는 잣대로 삼아야 한다. 자기 개혁 없이 타인 개혁에만 혈안이 되니 교회는 아프다. 개인 개혁은 제쳐 두고 사회 개혁만 부르짖으니 진정한 개혁이 올 수 없다. 내면적인 개혁, 영적인 개혁 없이 제도나 외형만 바꾸려 하니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수준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세상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복음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주님은 이미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 있는 복음을 주셨다. 그런데 복음적인 삶이 없기에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하기에 교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그래서 전도를 해도 교회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너희들이나 잘하라’고 한다.

이제 교회는 거룩한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의 영광과 거룩함을 되찾아야 한다. 교회는 좀 더 깨끗하고, 정직해야 한다. 세상의 흐름과는 다른 흐름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 세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사실 우스운 일이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산상보훈을 보라. 교회가 상식이라니?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갖고 있는 게 교회 아닌가? 세상이 따라 잡을 수 없는 깜짝 놀랄 만한 윤리를 갖고 있는 게 복음 아닌가? 그런데 상식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슬로건을 내거는, 피를 토하는 목회자의 심정을 이해한다.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교회. 상식선도 지키지 않는 목회자. 상식적인 삶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그러기에 가슴 찢어지는 마음으로 내건 슬로건일 게다.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던, 한 시대의 영웅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리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발 아래 두고 내가 흥하려고 하는가? 예수님은 쇠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 교회는 짓밟히든 말든 관심이 없다. 내 실속만 차리면 그만이다. 내 이름만 날리면 된다. 그래서 자리를 차지해서 권세를 휘두르려고 한다. 그러니 피 터지게 싸운다. 그러면서 말한다. 진리를 위해서라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교회를 위해서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는 그렇지 못하다.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한다. 이제 멈춰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 법정은 뒷돈이 사라지고 있는데, 왜 총회와 노회 재판국에서는 여전히 검은 돈이 오갈까? 돈이 오가면 진리가 비진리가 되고, 비진리가 진리로 둔갑한다. 어디 그 뿐인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서 교회 망신시키기가 일쑤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7주년을 맞았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멈추는 순간 교회는 오염되기 시작한다. 하나님 말씀의 경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 인간의 의를 주장할 건 없다. 그러나 의인은 행위가 따르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