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백운산 기독교 공동묘원 입구. 입구 왼쪽 벽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성구가 새겨져 있다.

광저우 북쪽에 백운산(白云山)이 있다. 그 산자락을 하얀 구름이 감싸고 있다. 백운산 자락을 오른쪽으로 돌아 남호 유람지를 지나면 기독교 공동묘지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 한 구석에 선교사들의 묘원이 있었다.

공동묘지 입구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묘원은 산 언덕에 있어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작은 문을 들어서자 야산이 펼쳐지고, 그 위에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산 멀리까지 비석들이 있어 까마득하다. 중국에 와서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보기는 처음이다. 죽은 자를 통해 그리스도 왕국이 세워진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묘지 위의 십자가이지만, 이렇게 많은 십자가를 세우기까지 선교사들이 흘린 눈물도 이 공원 묘지의 비석만큼 셀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묻힌 중국인 교인들의 사망 연도를 보니,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중기가 가장 많았다. 초창기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했던 제자들이며 동역자들인 것이다. 비문에 목사, 여자 전도사 혹은 의사, 선생님 등 생전에 했던 일들이 간단히 새겨져 있었다. 비문 위에 사진을 새겨놓기도 해, 멀리서 보면 방문한 사람을 반기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작은 돌에 새겨진 짤막한 사연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

▲산 언덕에 있는 공동묘원. 들어가면 십자가를 새긴 비석들이 한눈에 올려다 보인다.

중국인 성도 묘지들은 남쪽을 향해 있고, 서양 선교사 묘원은 서쪽을 보고 돌아서 있었다. 비석도 중국인들과 다르고 묘비들도 간소하다. 중국인들이 묘지를 찾는 청명절에도 유독 이 선교사 묘원만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찾는 이도 없고 이곳을 기념하는 어떤 안내비도 없이 조용하기 그지없다. 비문 앞은 영어로, 뒤는 중국어로 쓰여 있었다.

세월의 비바람에 씻겨 비석의 글자들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관리소에 문의했지만 묻혀 있는 선교사들의 명단도 없었다.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몇백 년 전 바다를 건너 광저우에 왔던 이들. 낯선 중국에서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었던 사람들. 19, 20세기 격동치는 중국 땅에 와서 한 알의 씨를 뿌렸던 고귀한 삶들이 여기 묻혀 있었다.

선교사들의 묘지는 비석들이 4줄로 서 있었다. 대략 50여 구 정도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있다. 중국인들의 비석처럼 상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시멘트 바닥에 낡은 비석만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영어 뿐 아니라 다른 언어로 표시된 비문도 간혹 보였다. 비석 모양도 십자가형, 끝이 타원형인 것, 직사각형 모양 등 다양하다. 희미하지만 출생 연도와 죽은 시기, 이름들이 적혀 있기도 하고,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인 혹은 유산된 아이라고 적힌 묘비도 간간이 보인다.

광둥성 선교사의 요건, 강인한 체력

▲선교사들은 범선을 타고 3달이 걸려 중국에 도착했다. 18세기 말 美 ‘황후호’ 모습. 영국에서 갓 독립한 미국은 중국 황실을 존중하는 뜻을 담은 황후호를 기점으로, 해외 무역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837년부터 1952년까지 북미장로회 광둥성 파송 선교사 명단에서 ‘사망’이라는 글자를 많이 보았다. 현지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이다. 선교사 194명 중 순교자 수가 32명 정도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와 부인들만의 집계이지, 어린 자녀들의 희생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스 목사의 첫 번째 아내, 그리고 둘째 아들, 켈 선교사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내, 세 자녀들 모두 중국에서 사망했다. 켈 선교사가 먼저 순교하고, 노예스 목사, 그리고 양장(阳江) 지역에서 대를 이어 의료 선교를 했던 톰슨 목사도 1926년 백운산 자락에 잠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잠깐 광저우 기후에 대해 약간 언급하기로 하자. 광저우는 아열대 기후로, 덥고 습기가 많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광저우에 들어와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이러한 기후였다. 여러 기록을 보면 19세기 광저우에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 특히 부인들과 아이들이 1년도 채 안 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본국에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선교사들도, 광저우에 도착한 이후 종종 앓곤 했다. 체력이 좋은 사람들조차도 버티기 힘들었다는 기록이 많다. 미국 선교위원회에서 중국 광둥성의 선교사 자격 요건에 강인한 체력을 조건으로 포함시킨 것도, 아마 초기 선교사들의 파송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1830년대 의료선교를 하다 미국 주중대사가 된 피터 파커(Peter Parker) 목사 부인은 광저우에서 15년간 아이를 갖지 못했다. 미국 워싱턴 D.C로 돌아간 후 뒤늦게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고온다습한 기후는 여성들에게 특히 좋지 않았다. 그리고 태평양을 횡단하는 노선이 생긴 1870년대 이전까지, 대부분 미국 선교사들은 100일 이상 범선을 타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 중국에 도착해야 했다. 이미 긴 선상 생활에서 병을 얻은 경우들도 많아, 도착 후에는 이미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중국 옛 문헌에 나와 있는 기독교 공동묘지는 광저우성 동문 쪽에 위치한 황화강(黄花岗)과 이망강(二望岗)에 있었다. 이 지명들은 현존하고 있으나, 황화강은 1911년 신해혁명 직전 의거로 사망한 72명의 열사들이 묻힌 공원으로 변했고, 그 이전의 역사는 묻혔다. 황화강 동북쪽에 위치한 이망강도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묘지가 이전되었다. 여기 있는 선교사님들의 묘지도 광저우가 개발되면서, 백운산 일부가 시내에 편입되고 묘지는 산의 뒷자락으로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 묘원들은 우여곡절의 역사 속에서 대부분 유실되고,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일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광저우 황화강 72열사 묘원. 손중산의 동맹회가 주도한 1911년 4월 의거 때 희생된 열사들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황화는 정절이 굳다는 뜻을 가진 ‘국화(菊花)’의 다른 말이다.

숨겨져서 더 슬픈 이야기

박제의원과 정신병원의 설립자 켈 선교사의 묘지를 찾아봤지만, 그곳에 없었다. 다만 거기서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세 자녀들의 묘비가 나란히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윌리엄 켈(William Arthur Kerr, 1859-1862), 존 켈(John Moseley Kerr, 1860-1862)이라는 두 살, 세 살의 두 아들이 1862년에 죽어 한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다른 비석에 페니 켈(Fanny Jane Kerr, 1862-1865)이라는 딸이 두 아들이 죽은 해에 태어났는데, 다시 네 살을 넘기지 못하고 1865년에 죽었다.

1865년 전후에 켈 선교사는 현재 박제의원의 부지를 구입, 의욕적으로 병원을 설립하고 있었다. 세 자녀를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어떤 병으로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연이어 죽었는지 모르지만, 눈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중국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분주했을 켈 선교사의 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대목에서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생각하게 했다.

켈 선교사가 남긴 유물인 중산대 제2부속병원과 방촌의 정신병원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중국 의학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는 일생 동안 74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고, 150여 명의 의사를 배출했다. 그가 중국인들을 향해 평생을 받친 사역은 수치로만 논할 수 없다.

▲50여 비석들이 나란히 세워진 선교사 묘원.

그러나 47년간의 중국 사역을 하면서 겪은 개인적 비극이 충분히 은폐되어 있었다는 것이 이 묘원에서 발견됐다. 그에 대한 찬사와 성과물을 설명하고 있는 어느 기록에도, 가족의 불행에 관한 어떤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휴식도 없이 지냈다는 개인적 헌신 말고도, 가족사는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산 선교사 묘원에서 우연히 발견한 세 자녀의 비석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지낸 극한의 시간들을 상상해 볼 뿐이다.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그의 인간적 고통이 애절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켈 선교사는 일생 동안 유난히 가족들의 죽음을 많이 경험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숙부 집에서 살아야 했다. 1854년 5월 15일 켈 선교사는 의사인 아내 킹스베리와 같이 뉴욕에서 상선을 타고 홍콩에 도착했다. 그러나 배에서 계속된 멀미와 함께 중국 남방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그의 부인은 중국에 도착한지 1년만에 홍콩에서 사망했다. 같은 의사로서 동역의 꿈을 꾸고 온 중국에서, 그는 아내를 잃고 말았다. 맡아서 운영하던 안과의원이 1856년 2차 아편전쟁으로 전소되자 미국으로 돌아가 있다가, 1858년 두 번째 부인인 모슬리(lsabella Jane Mosely)와 결혼해서 다시 중국에 왔다. 1859년 집 하나를 구해 병원을 다시 열었는데, 이 병원이 박제의원이다.

이후 켈 선교사의 삶이 얼마나 바빴는지는 병원 진료 일지나 지방 의료순회 기록들, 그리고 다른 동역자들과의 사역에 등장하는 그의 역할들을 살펴볼 때 추측할 수 있다. 그는 1885년에 둘째 부인을 잃고 말았다. 두 번째 부인 모슬리 역시 북미장로회 명부에는 의료 선교사로 기록돼 있었는데, 그녀의 기록은 1858년에 와서 1885년에 사망했다는 짧은 문구밖에 없다. 어린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엄마는 없다.

▲켈 선교사의 두 아들이 합장된 묘. 1862년 그는 두 살과 세 살된 두 아들을 잃었다.

그의 기록을 보면서, 18세기 말 일찍이 인도로 갔던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 선교사와 그의 미쳐버린 아내 도로시를 떠올려 보았다. 두 부인과의 사별, 연이은 어린 자녀들과의 이별, 생명을 살리는 의사였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영역들 속에서도, 켈 선교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 같다. 켈 선교사가 살아간 모습에서 한 방울의 힘마저 다 흘리고 간 열정과 영혼 사랑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 묘원에서 켈 선교사 무덤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중산2의원 관계자에게서 “지금도 중국인들이 백운산에 있는 그의 무덤을 간간이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묘원 부근에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광저우의 선교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문화혁명이라는 광풍을 겪으면서도 중국인들이 선교 역사의 흔적들을 온전한 모양은 아니지만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한국의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는 학생들과 교인들이 찾아와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을 되새기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묘원을 훑고 산등성이를 넘어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기를 기대해 본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