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0월 12일
본문: 로마서 1:17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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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혁은 미봉책이 아니다!
‘의’는 타협이나 미봉책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지를 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radical’한 변화의 문제였다고 말이죠.
2000년 암스테르담에서 복음주의 회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약과 매춘이 합법화되어 있는 도시에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마약을 나누어줍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이 마약이 떨어지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교회가 한다고 말입니다.
유럽의 교회들을 보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아주 현실적인 대처를 합니다. 양산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보호의 문제.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교회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란 완전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개혁이란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겪었던 일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평생 중국에서 선교를 한 허드슨 테일러에게 하루는 한 중국인이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저도 이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되려면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합니까? 또 교회를 몇 년이나 다녀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허드슨 선교사는 한 영혼이 회심한 것에 매우 기뻤지만, 먼저 오해를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구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예를 들어주었습니다.
“먼저 제 질문에 답해주셔야 합니다. 촛불에 불을 붙이면 얼마나 기다려야 빛이 납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촛불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바로 빛이 나지 않습니까?”
당황한 중국인을 보며 허드슨 선교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구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 생활을 오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촛불에 불을 붙이고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듯이 구원 또한 어떠한 노력도 없이 믿기만 한다면 그냥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과 인종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믿는 순간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선교사의 설명을 들은 중국인은 기쁨이 만연하여 마을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를 통해 종교개혁의 가장 큰 밑거름은 성서 번역이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후스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며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성서를 통해서 사람들은 이제 교황과 성직자들의 교회 조직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95개 조항의 반박문, 만인 제사장직 같은 것이죠.
무엇보다도 그의 종교개혁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무너뜨리므로 근대적인 직업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루터하면 생각나는 찬송이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사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강력한 교황의 힘과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여 반박했다는 것이 말입니다.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우리는 존 위클리프의 죽음 뒤에 무덤을 파헤쳤던 사실과 얀 후스가 어떻게 처형을 당했는지도 보았습니다.
루터는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일개 수도사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1521년 그가 보름스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역시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멋진 신앙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1519년 작성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조금 더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면죄부와 고해성사에 대한 반박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죄인이 범한 죄에 대해 통회하고 자복하면 죄에 따른 죄책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데, 그 죄에 대한 사제가 주는 형벌에 대해서는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세상의 처벌로서 죄의 경중에 따라 기도, 시편 읽기, 선행, 구제 행위, 성지순례를 명령하였는데, 이 형벌을 면제받게 해주는 것이 면죄부입니다.
참 재미있죠?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고 성경의 진리가 이렇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읽는 성경이 형벌이 되며, 우리가 하는 기도가 형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는 선행이 죄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형벌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어떤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면죄부 판매가 가장 극성을 부린 것은 1514-1517년 사이에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을 완성하는 시기였습니다. 여기에서 또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실상은 면죄부가 죄를 사하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짓기 위해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될 때 타락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관광하며 그 장대함에 혀를 내두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그 웅장한 성전 안에 계시겠습니까? 그 웅장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교황의 위대함을 자랑하기 위한 건물일 뿐입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우리는 관광할 수는 있지만,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그해 말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바젤에서 출판되었고, 1518년에는 95개 조항 논제 해설을 썼으며 커다란 반향은 종교개혁의 열매로 옮겨갔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논쟁은 결국 교황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논쟁으로 번져갑니다. 루터는 “sola scriprura”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내세웁니다.
교황청을 옹호하는 자들은 성경 이외에 종교회의 결정사항, 교황의 교령 등의 권위를 내세우고, 특히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인 교황에게 성경해석권이 있어서 교황이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하죠.
하지만, 교회가 종교회의를 통해 성경 66권을 정했지만, 이 성경은 교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었고, 이 말씀의 토대 위에 교회가 세워졌을 뿐입니다.
루터에게 최고의 권위는 66권의 성경뿐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성경 이외에 외경에 있는 연옥을 주장하므로 외경까지 성경에 포함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외경을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존재합니다. 성경 66권인지 아니면 외경까지 포함하는지 말입니다. 가톨릭은 외경뿐만 아니라 구전의 권위도 인정하는데 루터는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루터를 통한 복음의 핵심 “칭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에게 종교개혁은 “이신칭의”의 교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은혜 가운데 들어가도록 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접하게 되는데 여러분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sola fide”와 “sola gratia”입니다.
먼저 루터의 핵심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신실한 종교인이자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으며, 지은 죄를 대신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죠.
그러나 그런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민이 오늘 본문을 통해 해결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열매이지 구원의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가톨릭교회의 오류는 선행을 열매가 아닌 구원의 조건으로 삼은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죄가 대속되었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의”를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이 무엇을 더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를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루터의 문제를 가장 확실하게 해결해 준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복음을 주셨다면 구원이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sola fide”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응답이 신앙입니다.
“의”가 무엇인가요?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받아들이면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의”가 됩니다.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입니다.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sola gratia”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는데,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받은 구원, 그 구원을 얻는 수단인 믿음도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가 왜 중요할까요?
이 복음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의 말씀도 보겠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믿음의 고백 앞에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건물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게 됩니다. 더는 교황권이 그 권력과 화려한 의상을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개혁신앙은 교회 건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온갖 장식과 미술품의 화려함을 성전에서 떼어내기 시작한 것이죠. 심지어 극단적인 개혁주의에서는 교회 안에 십자가도 걸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신앙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당시 교황권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한 “이신칭의”의 논쟁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논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루터의 교리에 대하여 가톨릭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루터에게 구원이란 어떤 행위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고서는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그 열매로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학박사였던 루터에게 이 부분은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함을 강조함으로 일어났던 부패에 대한 과격한 강조였을 뿐입니다.
사실 이 둘은 대립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열매로서 선행이 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믿음의 열매로서 선행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서 “구원”의 문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지.”
왜냐하면, 믿음의 씨가 뿌려지면 당연히 그 씨의 열매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없다면 씨를 뿌리지 않았거나 잘못 뿌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은 끊임없는 이 둘의 긴장관계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행함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의 행위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앞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면 은혜자로서 살아야 되는 우리의 삶에 소홀하기 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여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이란, 우리의 삶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대하여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참 딱 맞지 않습니까?
“신앙생활!”
신앙은 생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사상 중 유명한 “sola scriptura”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복음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정립한 귀중한 획을 긋는 분깃점이 됩니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성경과 그리스도로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꼭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루터의 신학에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삶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 인간은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 율법 아래서 우리의 죄성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아주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율법 아래 죄를 깨닫고 절망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말했던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몽학선생”이란, 그리스 시대에 아이가 자라나 16세가 될 때까지 시중을 들며 학교에까지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절망 앞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의 정죄” 기능을 루터는 아주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율법 아래서 깊이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복음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게 되고, 죄가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더 감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율법에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십자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과 선행의 무거운 짐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기쁨으로 바꿔줍니다. 이제 신앙은 지루하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가 라틴어 예배의식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므로 이제 예배는 미사에서 벗어나 설교를 듣는 청각적이 예배로 개혁되었습니다.
또한, 신부만 읽던 라틴어 성경을 모든 평신도도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물어뜨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설 수 있게 한 것이죠.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얻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입니다.
루터는 그의 유명한 [기도자의 자유]에서 고린도전서 9장 19절의 말씀을 중요하게 인용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복음을 믿음으로써 얻은 자유는 방종과 향락의 기회가 아닌 성령의 노예가 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분명히 율법적인 신앙에 얽매이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거부하는 우리의 속마음이 잘못하면 방종으로 이끌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의 “자유”는 “십자가 신학”과 연결될 때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8장 17절에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강조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단순히 명상하고 사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짐을 지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루터는 많은 논쟁 중에 특별히 1519년에 있었던 라이프찌히 논쟁을 기점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는 루터의 이러한 노력을 가리켜 “값비싼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값비싼 은혜가 너무나 값싸게 여겨지기 때문이 아닌가요?
십자가의 핏 값으로 사신 생명은 그렇게 싼 것이 아닙니다. 그 값비싼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얻는 자유는 그렇게 값싸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둘의 긴장이 늘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얻은 자유함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유함을 누린다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거부한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값없어지겠습니까?
은혜와 율법, 자유와 고난이 어우러지는 복음을 “값비싼 은혜”라 표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루터가 수도원에서 안일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수도사적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원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은 값비싼 은혜의 결단이라고 이해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 성공과 기적과 축복과 형통만을 추구하지,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루터의 값비싼 은혜를 무시하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12장 1~6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열매”라는 설교를 했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주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역은 두 가지 견해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사역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서 복을 누리게 하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며,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사역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본보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 헌신은 이웃의 유익을 위한 우리의 행위를 나누어 주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이며, 그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헌신과 같습니다.
이 둘의 긴장관계 속에서 교회의 기능이 드러납니다.
루터는 교회를 “기독교인의 병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교회에서 신자는 치유를 받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의로운 죄인이 모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인이란 완전한 의인과 동시에 완전한 죄인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의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완전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완전한 의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역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죄인이 완전한 의인으로 서는 곳입니다.
교회의 완전함은 우리의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완전함에 있습니다.
복음 앞에 서지 않는 어떤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어떤 사제나 교황조차도 자신의 의를 주장할 근거가 없습니다.
오로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의인일 뿐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기대하거나 자랑할 수 없는 곳입니다.
루터의 신학 안에서 우리는 신앙과 삶의 긴장관계를 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루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야 할 또 하나의 종교개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나 자신의 주장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곳에 인간의 주장과 자랑이 난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곳에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위험한 곳에 와 있는 듯합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오직”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