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10월 12일
본문: 골로새서 2:8~19
설교: 이수영(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바로 자라며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경청해야 할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8절을 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 "철학"이라는 말은 이방인 교회 안의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을 일컬어 철학 또는 지혜의 교훈이라 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힘들의 배후에는 악한 천사들의 권능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대교적 전통과 이방적 전통에서 생긴 종교적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지식의 튼튼한 토대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왜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꼭 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셨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곧 그는 완전한 사람이며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10절의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는 말은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 어떤 통치자나 권세도 다 그 아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진다는 것은 우리 또한 완전히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또 삶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하여 다른 종교나 의식이나 비성경적인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철학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삶의 길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진정 의미 있는 삶으로 살고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14:6-11절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삶의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하여, 참된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가 만나야 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의 아들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성이 충만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육체에 행하는 옛 할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로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육체에 표시를 하는 할례가 아니라 아예 육체를 벗는 할례입니다. 즉 육에 속했던 자에서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습니다. 본문 11절을 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 가운데 둘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할례 대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표지는 세례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본래 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입니다. 물속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다시 나오는 것은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육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 일으키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가 곧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할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 가운데 셋째는 모든 죄의 용서와 완전사면입니다. 세례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행위와 함께 행해지는 의식인데 물속에 완전히 들어가는 행위에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14절에서 쓰기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육체에 할례도 받지 않아 육신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고 또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인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때는 우리의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단순히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법조문으로 우리를 죄인이라 선고하는 판결문을 지워버리시고 그 문서를 아예 없애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호적에 빨간 줄 쳐진 것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아예 그 호적을 불태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노예문서를 불태워버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 가운데 넷째는 승리와 평안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들과 그들 배후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을 무력화하시고 구경거리로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의 노예이고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악마의 노리개밖에 되지 못했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로 우리를 그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1:13-14에서 쓰기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말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악마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죄의 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잘못 경배의 대상이 되는 천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지상적 권력이든 영적 세계의 권세이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다 이기시고 무력화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력화한다는 것은 무장해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들에게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는 힘과 무기를 다 빼앗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는 패자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옛날에는 적국의 패잔병 포로들을 무장해제 시킬 뿐만 아니라 개선행진 때 쇠사슬에 매어 끌고 가며 시민들에게 구경거리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완전히 발가벗겨서 끌고 가기고 합니다. 구경하는 시민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로 그리스도인에게 대적이 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모두 그런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와 죄악 가운데서 패배자의 삶밖에 살 수 없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외의 다른 어떤 것을 머리로 삼고 그 가르침이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하려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것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 권면 속에는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 가르침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것들입니다. "절기"란 매년 지키는 명절을 말하고 "초하루"는 매월 지키는 날을 말하며 안식일은 매주 지키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초하루"는 초생달 때부터 시작되는 새 달의 첫 날을 말합니다. 여기서 초하루는 음력 초하루의 축제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매달 초하루에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 중 하나였습니다(민10:10, 28:11-15).
이 의식들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러한 의식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얻는 자유를 모르는 거짓 교사들도 그렇게 가르치며 비난했는데 그런 가르침과 비난을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말며 그런 가르침과 비난에 의해 신자들이 영향을 받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말은 음식에 관한 규정이라든가 특정한 날이나 절기들의 준수에 관한 규정 같은 것은 모두 그러한 규정들이 주어질 당시에서 볼 때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드러날 것이었던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뜻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몸통 즉 그림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은 더 이상 그림자를 따를 것이 아니라 실체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고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본문 18-19절을 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꾸며낸 겸손"이란 거짓 겸손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 가운데는 남에게 자기를 예외적으로 경건하게 보이기 위한 금욕적 행위로써 자신의 겸손을 표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식을 통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또 그는 18절 중간에서 환상을 보는 것에 관한 그들의 주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본 것"이라는 말은 위에 있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환상을 더 잘 보기 위한 금욕의 한 방법으로 금식을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금식이 바로 꾸며낸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지 말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또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 단계의 천사들을 거쳐서만 그에게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천사들을 숭배해야 한다는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말씀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종일 뿐이며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출20:3-5, 계22:8-9).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얻은 구속의 온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 것을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며 떠드는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하며 그런 자들이 자기들처럼 천사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신자들을 정죄하는 일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머리를 붙들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에 달려있어 한 몸으로 연합되고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데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지 않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지 않은 자들의 가르침은 헛된 속임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가르침은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한 몸이어야 하는 분열시킬 뿐이므로 그들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본문 8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시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 외의 다른 거짓 가르침과 헛된 속임수에 현혹되고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