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어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낮 12시(제6시)부터 오후 3시(제9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다(눅 23:44). 이 3시간 동안 어둠이 온 땅을 뒤덮은 것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과 교제가 완전히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다(히 4:5). 그러나 우리의 죄가 예수께 전이되었기 때문에 그런 막힘이 생겼고, 3시간 동안 초자연적인 어두움이 온 땅을 엄습한 것이다.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이 임함과 함께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눅 23:45).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존재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마지막 희생 제물이 되셨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마지막 제물일 뿐 아니라, 단 한 번으로 영원히 드리는 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에서 다른 희생 제물을 드릴 이유가 없음을 뜻한다. 그런 사실이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신앙적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성전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장소인데, 예수께서 마지막의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성 안에도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께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계 21:22).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성전이 존재할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은, 또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3시간 온 땅을 뒤덮었던 어두움은 걷히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로 부르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계 회복을 근거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드렸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단계로 영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맞이하셨다. 육체는 땅으로, 영혼은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생명의 불가피성을 직접 경험하신 것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성을 지닌다. 그런 유한성 때문에 육체가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소중한 그릇이다. 건전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육체의 한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낡는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육체를 지나치게 신뢰하면 결국에 가서 낙심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짐으로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다. 영육의 균형을 유지하되 영혼 우선주의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영육이 지닌 본래적 속성 때문이다. 육체는 점차로 낡아 마지막에는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마지막까지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모습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건강과 아름다움이다.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은 영혼을 하나님 손에 위탁한다는 내용이다. 예수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본받아야 한다. 그 모범을 그대로 따른 인물이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이다. 돌로 치는 유대인들 앞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예수의 가상칠언 중 첫 번째와 마지막 것과 같은 내용이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가 그것이다.

스데반이 따른 예수의 모범은 이제 우리가 뒤따라 실천할 차례가 되었다. 가상칠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이 따를 신앙의 이정표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