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대 내 영남학원은 1988년 시작된 국제경영대학원으로, 서구대학이었던 영남대학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취지 하에 설립되었다.

영남대학 건축물들

중산대학은 현재 광둥성에 4개의 캠퍼스가 있다. 광저우시의 월수구와 대학성, 그리고 강락촌에 세 개, 그리고 주해시에 한 캠퍼스가 있다. 영남대학은 1952년 중산대학과 합치면서, 중산대학이 영남대학이 있는 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현재 중산대 강락촌 캠퍼스 안에는 영남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강락촌 캠퍼스에 들어서면 자연과 가까이 한 영남(岭南)인의 정서가 풍긴다. 오래된 고목들이 주는 안정감이 학교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영남은 예로부터 광둥성을 포함하여 광서, 복건, 해남성 일대를 부르던 통칭이다. 5개의 산맥 남쪽에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 중산대학은 정문이 남쪽에 있지만 원래 영남대학은 북쪽의 주강을 보고 있었다. 북문이 정문인 셈이었다. 북문으로 들어가 캠퍼스 중앙 길을 따라 남쪽을 향해 걸어 보자. 길게 펼쳐진 초록의 잔디밭 사이로 미풍이 볼을 간지럽힌다. 나무에 가려져 있던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살짝 얼굴을 드러낸다. 영남대 건축물 50여 채가 캠퍼스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마틴 홀의 옛 전경, 중국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영남대학 안에는 교회와 강당을 비롯해 공학원, 농학원, 문학원, 뒤이어 합류한 의학원, 협화신학원 등 5개 학원 건물들이 있었다. 각 학원에는 한 동의 학원 건물이 있었고, 학원동 안에는 강당을 비롯해서 도서관, 강의실, 행정실, 교제실 등이 있었다. 그리고 남녀 학생들의 기숙사가 따로 있었고, 교수들의 사택 또한 있었다. 대학 관련 건물들 뿐 아니라 부속 초, 중, 고등학교 및 화교 학교도 단지 안에 있어서 건물들이 200여 채가 넘었다고 한다.

강의동 및 행정 관련 건축물들은 대부분 미국 기부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공되었고, 건축 설계도 당시 미국인들이 맡았다. 영남대학 건축물들은 미국의 근대 건축 기술이 바로 도입되어 건축 방면에도 좋은 연구 사례를 남기고 있다. 녹색 지붕에 붉은 벽돌 건물로 중국의 정서를 드러내기도 하고, 덥고 습한 이곳의 기후를 감안해서 지중해식 주랑과 아치형의 열린 복도를 만들어 기능과 외관을 잘 살렸다.

조금 더 남쪽으로 걸어가면 1905년 준공된 마틴 홀(Martin Hall, 马丁堂)을 볼 수 있다.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건물명을 지었는데, 중국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건물 현관에 마틴홀이라 영어로 표기된 표시가 있었지만, 세월과 함께 없어졌다.

▲그랜트 홀 옛날 사진, 지붕에 시계탑이 있고 학교의 행정동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앞 계단에 손중산 선생이 신해혁명 후 영남대학을 방문, 학교 관계자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돌에 새겨져 있다. 크리스찬인 손중산 선생은 기독교 대학이었던 영남대학을 자주 방문해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격려했다. 사진 밑에는 2002년 마틴 홀을 비롯한 이 부근의 영남대 건축물들을 광저우시 보호문물로 지정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마틴홀은 학생들의 강의실로 줄곧 사용되다가 현재는 비어 있다.

마틴 홀에서 조금 올라가면 그랜트 홀(Grant Hall, 格兰堂)이 나타난다. 1916년 완공되었으며 뉴저지주 부호의 아들 그랜트 선생이 기부했다. 그랜트 씨는 영남학당의 전신인 격치서원 뉴욕의 이사장을 맡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건물 꼭대기에 시간을 알려주는 큰 시계탑이 있어 대종루(大钟楼)라 부르기도 했다. 들어가는 현관 벽 위 동그라미 안에 원래 그랜트 홀을 뜻하는 G. H라는 표기가 있었으나 없어졌다. 입구 양 옆 기둥의 움푹 들어간 곳에 기독교를 나타내는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홈을 파서 없애 버린 것이다. 흔적을 없애려다 도리어 흔적이 남아 버렸다. 이 건물은 행정동으로 사용되었는데, 몇 해 전 새 건물로 이사 가서 현재는 부분적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펼쳐진 잔디밭을 가로막고 있는 우아한 건물이 눈에 띈다. 스와지 홀(Swasey Hall, 怀士堂)이라 불리는 기독교 청년회의소였다. 입학, 졸업식 등 각종 기념식들을 행했던 곳으로, 영남대학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1980년대 광동성 우표에도 이 건축물이 등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다. 옛 사진에 보면 입구 양쪽에 2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스와지홀 앞 기념식수 장면. 스와지홀의 두 기둥에 십자가가 선명하다.

강의동 뿐 아니라 학생들과 교직원 숙소 건물들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자바 홀(爪哇堂)은 최초의 남학생 기숙사로 1919년 완공되었다. 종영광 교수가 인도네시아 자바에 사는 화교들의 기부를 받아 지어서 자바당이라 부른다. 영빈루 가까이에 있는 영광당은 1924년 완공된 두 번째 학생 기숙사였다. 종영광 교수는 학교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해외로 다니며 화교들의 도움을 받아 수십 채의 건물을 건축했다. 학교는 종영광 교수의 뜻을 기려 영광당이라 이름지었고 현재 숙박 시설과 커피숍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남북으로 가로질러 펼쳐진 잔디밭 한가운데 싱팅(惺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일깨움을 주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1928년 건립되었는데, 학우들이 사견여(史坚如)를 비롯한 3명의 열사 친구들을 기려 세운 정자이다. 사견여는 1898년 격치서원에 입학하여 물리, 화학, 수학 등 근대 과학 지식을 습득한 크리스천 학생이었다. 흥중회에 들어가 활동하다 1900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21살의 나이로 희생되었다. 신해혁명 후 손중산은 친히 그의 기념탑 모금을 할 정도로 그를 애석히 여겼다 한다. 중화민국 초기 우표에 영웅으로 나올 정도였다.

배영학교 기록에 보면 노예스 목사가 반청 학생 사견여 같은 학생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견여는 기독교 학교인 배영학교가 잠시 격치서원과 합병된 그 시기에 근대 사상을 배웠고, 혁명지사로서 짧은 삶을 살다갔다. 손중산 선생의 최측근 동역자 진소백도 격치서원 출신이었다.

▲스와지홀은 졸업 입학식 등 각종 학교의 기념식을 했던 곳으로, 지금도 학생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건축물이다.

영남대 묘원인 교회산

대학 내에는 특이한 곳이 하나 있다. 최근 학교 지도에서도 사라진 곳인데, 교회산(敎会山)이라 부르는 영남대학 묘원이다. 당시 영남대학 내 교회에서 관리하던 곳이다. 광둥 사람들은 묘지를 산(山)이라 말한다. 중산대 서문 쪽 서구시장(西区市场)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일 년에 한 번 한식날에만 개방되는 꼭꼭 숨은 곳이기도 하다.

1905년부터 1912년 사이의 영남대학 관련인들 교수, 학생, 직원, 혹은 일하는 근로자들이 묻혀 있었다. 농학부 교수이면서 학장이었던 그로프(Johu H. Groff), 수학과 교수였던 맥도날드(Wifrid E. Macdonald), 화학 교수였던 스펜서(Selbry P. Spencer), 그리고 의학원 원장 부인인 캐드버리(Sara N. Cadbury) 등도 있고, 영남대학 내에 있던 부속중학교의 교원들도 있었다.

기독교 대학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교육 선교사들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중산대 교수들이 모여 사는 사택에 포위당한 듯한 이 공원묘지의 미래가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묘지 관리인은 몇 년 전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 간단히 답해 주었다.

▲중산대 교정 안에 있는 영남대 묘원인 교회산. 청명절 하루만 개방된다.

중국인으로는 손중산 선생의 외손인 대영풍(戴永丰)과 격치서원을 거쳐 영남대 중국인 최초의 학장이자 영남대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는 종영광 교수의 묘도 같이 있다. 당시 이 묘원에 묻히기는 까다로웠는데,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했다. 문화혁명 때 일부 훼손되었고, 1980년대 중산대학이 개발되면서 일부 묘지들은 이장을 했다. 십자가를 파낸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아직 돌에 새겨진 십자가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리슨 선교사님의 초기 성경 번역을 도왔던 양발도 이 묘지에 묻혔다가 문화혁명 때 훼손되었다. 양발의 묘비는 현재 중산대학 도서관 입구로 옮겨가 그의 근대 인쇄업자로서의 공적을 기리고 있었다. 그가 쓴 전도 책자 권세양언이 근대 인쇄술로 편찬되어 그 방면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락촌에서 기독교대학으로서의 영남대학은 1903년부터 1952년까지 약 반세기를 지나왔다. 교회산은 지금의 중산대학이 영남대학을 그 모태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곳이다. 중산대학은 단순한 대학 캠퍼스가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구석구석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종영광 교수의 이름을 딴 영광당의 1층 복도에 옛 영남대학의 역사 사진들이 걸려 있다.

영남대학의 부활

서구 기독교 학교로 출발한 광저우의 영남대학은 일찍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첫째는 자체 생명력이고, 둘째는 국제성이다.

초창기부터 교사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었고, 서구식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들은 중국식 권위주의보다는 일찍부터 학생 자치회 활동을 장려했다. 필요한 학내 규칙은 투표로 결정했다. 자치회 회원이 아니더라도 영남대학생이라면 모두 자치회가 만든 규칙을 지켜야 할 정도로, 자치회는 막강한 권위를 가졌다. 자치를 통해서 학생들이 양호한 자제력을 가져야 공정한 세계 시민이 된다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초기에는 자치회 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전도하는 청년회도 있었다.

이런 영남대학의 정신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명분 있는 단결력을 높였다. 영남대학의 역사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교지 문제로 광저우에서도 여러 번 이사를 다녔고, 1900년에는 반체제 학생들 때문에 마카오로 대피해야 했다. 1937년에는 광저우가 일본군에 점령당하자 홍콩으로 대학을 이전해야 했고, 1941년 홍콩도 점령되자 광둥성 북쪽 소관시로 이전했다. 어려울 때마다 동문들의 단결로 대학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기부자 이름을 딴 그랜트홀. 행정동으로 사용되었다.

국제성도 영남대학이 내세울 만한 유전자이다. 영어로 수업을 했고, 1927년까지 미국 선교사들의 교장 시절에 이미 영남대학의 졸업장은 미국 유명대학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화교 네트워크로부터 영남대학은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광저우인들은 예로부터 해외로 나갔다. 세 집 건너 한 집은 해외에 화교 친척을 가질 정도이다. 영남대학은 재정이 어려우면 미국 등은 물론이고 동남아 화교들의 적극적인 기부로 대학 강의실, 실험실, 기숙사들을 지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도 받았지만, 화교 교육도 지원했다. 1929년에 싱가포르 화교들의 요구로 영남대학 분교를 만들었고 1938년에는 베트남에도 분교를 만들었다.

1952년 신 중국 정부는 서구 기독교의 전통을 가진 영남대학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러나 영남대학의 유전자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 광저우에서 떠나야만 했던 영남대학의 이사진과 동문들은 홍콩에서 다시 뭉쳤다. 1967년 초급 대학 수준의 영남학당을 만들고 1995년 둔문(屯门)에 영구 교지를 마련했다. 마침내 1999년에 영남대학은 홍콩에서 종합대학으로 부활했다.

대륙에서도 영남대학은 부활했다. 영남대학 창립 100주년이 된 1988년 중국 교육부는 창립식 하루 전에 중산대학 부속 영남대학부의 부활을 승인했다. 중산대 북문에서 조금 들어가면 낡은 건물에 영남대학의 표시판이 보인다. 국제경영학과 경제학 전문 대학원 기구이다. 중국 내외 성공한 영남대학 출신 동문들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요청으로 이루어진 성과였다.

▲지금의 중산대학 남문과 북문을 잇는 잔디밭. 중간에 사견여 열사를 기념하는 싱팅과 손중산의 동산이 있다.

그 옆 건물 영광당 1층 복도 벽에 옛 영남대학의 건축물 및 전경 사진들이 걸려 있어 오래 전 이곳을 돌아보게 한다. 건물은 낡고, 학교 이름은 바뀌었지만 기독교 정신을 가진 청년들이 꿈꾸었던 하늘의 비전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