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사랑은 함께하며(1:8) 칭찬이 따르고(1:9-10, 1:12-17) 주는 것이다(1:11). 아가서는 이 에로스적 사랑의 비유를 통해 상징적 사랑(하나님과 교회, 그리스도와 성도)으로 나아간다. 본문은 그 사랑의 중요한 특징 네 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 사랑의 특징 1. 합당한 대상-사랑은 합당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전부일까?(1-7절)

즉 사랑은 사랑의 대상끼리 사랑을 서로 주고받는다. 술람미 여인(1, 3-7절)과 솔로몬(2절)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다. 하나님과 교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다. 다만 사랑을 내 마음과 취향에 맞는 대상의 관계로만 보면 절대 안 된다.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대상으로만 보는 것을 경계한다. 외모와 인기와 명성과 물질을 소유한 연예인들의 결혼을 보라. 연예인은 사랑받을 만한 조건들을 잘 갖춘 대표적인 사람들(대상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을 보면, 사귀는 도중 혹은 결혼하고 나서 결별한 커플보다 결별하지 않은 커플 찾기가 헐씬 어려울 정도이다. 사랑을 단순한 외적 조건만 보고 접근한 결과는 아닐까? 사랑을 대상으로만 보면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사랑을 대상으로만 보면 사랑을 소유 개념으로 보게 된다. 사랑은 소유 개념이 아니다. 만일 소유 개념으로 보게 되면, 그 대상의 소유 가치가 사라지면 그 사랑은 돌변한다. 소유할 가치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중도 장애자들이 그 장애로 인해 고통받고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사랑을 대상이자 소유 개념으로만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프롬이 볼 때 사랑은 대상을 넘어 능력의 문제이다. 궁극적으로 음악이나 미술이나 건축 같은 기술이나 예술처럼, 훈련되고 성숙되어야 참 사랑으로 승화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전혀 긍휼히 여김을 받을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호 2:23).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사랑하셨다. 사랑은 이렇게 대상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대상이 ‘그리 아니하더라도’ 변함없이 상대를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2) 사랑의 특징 2. 겸손- 사랑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1절)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 같다는 고백은 무슨 의미일까? 이들 샤론의 장미(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는 들꽃들이다. 소박하고 투박하고 촌스러운 꽃을 상징한다. 참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사랑의 대상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 자기에게 다가오고 자기를 배려해 주기를 갈급하고 있다. 오히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따뜻한 배려의 마음으로 다가가 보라.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듯,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다가가듯, 자신을 낮추고 다가설 때 사랑은 비로소 신기한 접촉점을 찾는다.

주님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간과 눈높이를 낮추신(accommodation) 자기 낮춤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기를 낮추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데 그치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믿고 거만해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특히 일부 사이비 부흥사들). 성령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이분들은 열매가 없든지, 유명하나 실은 여전히 젖먹이 신앙이든지, 성령 비슷한 것을 받았을 뿐 참 성령을 받은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낮아진다. 인간은 겨우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겸손을 배우고 참사랑을 하라.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모르고 참 성공을 할 수 없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3) 사랑의 특징 3. 사랑하는 자를 높임-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높인다(2-4절)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칭찬하는 장면을 보라.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백합화가 어때서 그러는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야’(2절)라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나무는 죄와 고난과 악을 상징한다. 백합화는 성결과 거룩을 상징한다(왕상 7:19; 시 60:1).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높인다. 부모를 높이고, 자녀를 높이고, 이웃을 높이고, 남편과 아내를 높여라!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오히려 여러분 스스로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일부러 들의 백합화를 지목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과 사랑의 상징물로 설교하였다(마 6:28-29). 술람미 여인도 왕을 높인다.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최고의 왕임을 표현) 같은 존재요 내 위에 깃발(왕의 영예와 보호를 상징)이며, 신랑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최고의 연회장(잔칫집)으로 데려가는 지극히 높은 영광의 왕이다(잔칫집은 이 세상 가장 소망이 넘치고 즐겁고 복된 자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는가? 들의 백합화는 마르면 아궁이에 던져질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솔로몬 왕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는 들의 백합화만도 못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제자들에게,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 믿는 자들을 돌보지 않겠느냐고 물으신다. 이게 바로 하나님 사랑이다.

4) 사랑의 특징 4. 열병과 같은 것- 참사랑은 하면 할수록 뜨거워진다(5-7절)

사랑에는 사랑 병이 있다(5절). 심신 양면이 모두 반응하며 뜨거워진다. 물론 그 신비는 사랑을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합일(合一)의 열망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말 무언가 원초적 그런 뜨거움이 생겨난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이런 열정적 측면을 생산적 능동성이라 하였다. 사람, 나무, 그림, 사상 등에 대한 돌봄, 앎, 반응, 긍정, 즐거움 등을 통해 이 뜨거운 생명력은 증대되고 소생한다.

제대로 된 믿음도 사랑처럼 뜨거움이 자란다. 서서히 식어버리는 사랑이나 무덤덤한 신앙은 오히려 정상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사랑 병은커녕, 이기적 열정으로 사랑하다 어느 순간 그 사랑마저 너무 쉽게 식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느 존경하는 목사님의 책 제목 가운데 <안아주심>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안아주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행복할 때나 부모처럼 안아주신다. 서로 꼭 안아주며 살라! 내부 화장실도 없던 팔당호수변 외딴 집에 살 때, 우리 가족 다섯은 한 방에서 방울뱀처럼 어울려 서로 안고 잠이 들었다. 방 안에는 사랑 호르몬이 넘쳐났다. 그때가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 몸 안에는 옥시토신이라는 포옹 호르몬이 있다. 출산, 수유, 오르가즘 시 혈중에 증가하는 화학물질이 바로 이 호르몬이다. 신체 접촉은 평안함과 기쁨과 면역력을 향상시켜 질병 저항력을 높인다. 포옹은 가장 강렬한 신체 접촉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결코 끊을 수 없다(7절).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요 3:16). 끊을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렬하다(롬 8:31-39). 사랑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를 인류의 친구로 내어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사 62:5).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고의 신랑감, 영원한 남편 그리스도(사 54:5, 사 62:5, 요 3:29, 마 25:6, 고후 11:2, 계 19:7-9, 엡 5:27-32)께 중매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구속주이며 화목 제물이 되신 본질이 사랑이신 분임을 잊지 말라!

사랑 풍경5-어머니

귀뚜라미 따라
장독대에 올라
피리를 불었다

담배 조리 아르바이트 가신
어머니 얼굴이
아쉽게 흩어진다

눈 먼 쏙독새처럼 그리워도
그해 가을은
조금 늦게 찾아왔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