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 선교사가 진광학교 학생들과 찍은 사진. 동생 헤리어트 선교사라고 하지만, 마샤 선교사로 추정된다.

노예스 가문의 중국 선교 1세대는, 앞서 소개한 노예스 목사와 헤리어트 선교사에 이어 마샤(Martha Noyes, 1840-1925) 선교사가 있었다. 마샤는 노예스 가문 형제 중 넷째였다.

그녀는 33세 때인 1873년, 동생 헤리어트 여사가 설립한 진광학교를 돕기 위해 광저우에 파송되었다. 그녀는 50년간 광저우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마샤는 미국 오하이오주 애스라이더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는데, 앞서 소개한 중국 최초 여자 의대를 설립한 풀턴이 그녀의 제자이기도 하다. 가족들의 기록에 보면 뚱뚱하고 낙천적인 성품이었던 마샤 선교사는, 붙임성도 좋고 열정적이어서 어떤 사람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진광학교에서 처음 종교적인 일들을 맡았다. 또 근처에 있는 박제의원에 가서 환자와 환자 가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했다. 병원 직원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그녀는 1886년 46세의 늦은 나이에 박제의원 원장인 켈 선교사와 결혼했다. 켈 선교사의 나이는 62세로 세 번째 결혼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북미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오랫동안 동역 관계에 있었다. 마샤는 결혼으로 진광학교 일을 그만두고 병원 사역에 전념하였다.

켈 선교사는 앞서 소개했듯 최초의 서양병원인 박제의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뒤늦게 장로회 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샤와 함께 정신병원을 세웠었다. 정신병원 개원 3년 후 켈 선교사가 순교하자, 병원 운영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부인 마샤이다. 정신병원은 점차 중국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는 국제적 병원이 되었다.

마샤 선교사는 오빠와 여동생에 버금가는 시간 동안 중국 사역을 했지만, 창업 사역을 하지 않아 그녀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진광학교와 박제의원, 그리고 정신병원 등 수많은 사역들이 열매를 맺기 어려웠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받쳐주는 기둥 역할을 했던 분이다.

▲2대손 윌리엄 목사(왼쪽)와 아내. 그들은 미국에서도 중국인 교회 사역을 감당했다.

중국에 왔던 3명의 노예스 가족들은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그런데 마샤가 뒤늦게 켈 선교사와 결혼함으로써, 노예스 가문의 사역은 의료 방면으로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예스 가문의 선교사는 3남매이지만, 노예스 목사 부인과 마샤 남편인 켈 선교사를 포함하면 모두 5명인 셈이다. 이들은 모두 광저우에서 50년 가까운 장기 사역을 하였다.

광둥에서 40년 이상 사역을 한 북미장로회 선교사는 14명이었다. 이들 중 노예스 가문 사람들이 무려 5명이었다. 한 곳에서 사역을 오래했다는 것이 의미 있는 선교를 했다는 보증은 아니지만, 뿌리 깊은 사역을 위한 조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다. 일생을 바친 제1대 노예스 가(家)는 광둥성 선교의 중심에 있던 가문이다. 그들은 광저우 뿐 아니라 광둥성 곳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근대 교육 및 의료 분야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2대는 미국 내 중국인들을 위한 사역

노예스 가문의 2대는 윌리엄(William Dean Noyes, 1876-1958) 목사이다. 1대인 열 명의 노예스 가문 남매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했어도 자식이 없었다. 유일하게 노예스 목사만이 자식을 두었다. 노예스 목사가 1866년 광저우에 왔을 때 신시아라는 아내를 데리고 왔으나, 그녀는 1년 만에 죽고 만다. 그 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서 화교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다 아라벨라와 재혼해서 1876년 다시 광저우로 돌아왔다. 두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윌리엄만 남았다. 열 명의 형제였던 노예스 가문은 둘째 아들인 노예스 목사에게서 난 윌리엄이 유일한 자손이 되었다.

윌리엄은 1살 때 광저우로 왔으며, 광저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 때 미국으로 돌아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3년간 신학 공부를 한 후, 배영학교로 돌아와 수학을 가르쳤다. 대외적으로 북미장로회와 관련된 일도 했다. 광저우 지회의 대표를 맡았고, 광저우로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에 잘 적응하도록 상담 역할도 했다. 교직에 있을 때 그의 노력으로 미국의 독지가 세브란스가 기부를 해서 배영에 다목적 홀인 세브란스홀을 짓기도 했다. 1914년 부친의 순교로 윌리엄 목사는 배영중학교 교장을 물려받아 6년 동안 재임했다.

▲배영학교 내 세브란스홀은 2대손 윌리엄이 미국 세브란스로부터 기부받아 지은 건물이며, 노예스 목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교육계에서도 중국 자치 및 반외세 분위기가 높아졌다. 고모인 헤리어트 선교사도 은퇴했다. 마침 윌리엄 부인의 건강도 악화되어, 가족들은 1919년 1월 1일에 중국을 떠났고, 6개월 뒤에는 윌리엄 목사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캐나다장로회의 국내 선교회의 요청이 왔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중국인 사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이민법은 동양인 배제법(The Oriental Exclusion Acts)으로, 가족을 동반한 이민이 허용되지 않는 인종 차별적 요소가 많았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음식점·세탁소 등에서 돈을 벌어 중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범죄의 유혹에도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수시로 문제가 터질 때 교회가 해결을 해야 했는데, 중국어를 잘 하는 윌리엄 목사가 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동부와 서부, 그리고 미국 동부까지 수시로 달려가야 했다.

그는 중국인을 위한 사역으로 동분서주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 부족한 생활비를 부인이 벌어야 했다. 아들 헨리의 유학 비용을 고향 오하이오에 사는 막내 고모 할머니에게 빌려야 했다. 1958년 윌리엄 목사가 죽은 후에는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져, 할아버지가 물려준 고향 집마저 팔아야 했다. 네 자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캐나다로 옮겨 다니면서 학교 생활도 힘들었다. 3세대인 윌리엄 목사의 자녀들은 어디를 가든 주변인으로 겉돌았다. 광둥에서는 외국 귀신(番鬼)으로, 미국에서는 중국놈(Chinks)으로, 캐나다에서는 양키(Yankees)로 불렸다. 3세대인 아이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감수해야 했다.

2세대인 윌리엄 목사는 아버지 노예스 목사 사역의 연장선에 있었다.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동일했지만, 그 지역은 달랐다. 아버지의 선교 대상은 광둥의 중국인이었지만, 윌리엄 목사는 북미의 중국인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선교의 내용과 수준도 달랐다. 교육을 통한 복음이 아니라, 해외 중국인의 인권운동을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3대손 헨리는 조상들의 이야기와 그의 생각을 책 ‘China Born(1989)’에 서술했다. 이 책은 배영 동문들 주도로 2010년에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대물림의 중국 사랑

제3대 윌리엄 목사는 빌, 헨리, 리처드, 제프리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네 명 중 중국과 관련해서 일한 사람은 둘째인 헨리 할시 노예스(Henry Halsey Noyes, 1910-2005)였다. 그는 1910년 중국에서 태어나 9살 때까지 광저우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89년에 자서전적인 책인 차이나 본(China Born)에 집안 이야기와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막내 동생이 제2차 세계대전 시 사망했다는 사실 외에 다른 형제인 첫째 형과 셋째 동생에 대해서는 상세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둘째 헨리를 통해 제3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2년, 캐나다에서 2년의 고등학교를 마치고 토론토 대학에 진학했다.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영국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유학 중에 거투르드 서니스를 만나 결혼한다. 그녀에게서 신중국을 서양에 알린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소개받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떠나온 후의 중국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캐나다 마니토바 대학과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리고 1959년, 우연한 기회에 중국 서적 유통업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정치·경제·문화 등에 대해 전면 봉쇄하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최소한 교류 필요성을 공감한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정부를 설득해 마침내 서적 허가권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1959년 중국 서적회사인 CB&P(China Books and Periodicals)를 설립했다. 부인과 아들 크리스토퍼가 같이 하는 가족 사업이었다.

1967년에는 본사를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 회사는 1951년 이래 미국과 중국 간 국교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중국 서적을 거래할 수 있는 독점권을 가졌다. 초기 유통망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나자 사업은 정상화되었다.

▲3대손 헨리와 4대손 크리스토퍼는 중국 서적 회사를 운영했다.

선교사 후손들은 증인 된 자

중국과 미국 간 국교 정상화에 즈음해서 CB&P가 주목을 받았다. 국교 단절기임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지속적인 연결 끈이 있었다는 사실에 미국 내 언론에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 노예스 가문의 제4대인 크리스토퍼는 국교 정상화 1년 전인 1971년 중국 출판사의 초청으로 5주간 중국을 방문했다. 10월에 열린 광저우 교역회의에 최초 미국인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암흑의 20년간 중국의 분위기를 알고 싶었던 공중파 방송사 NBC는 크리스토퍼의 인터뷰를 메인 뉴스에 보도할 정도였다.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사업은 원활하게 잘 진행되었다. 그동안 3대 헨리가 경영을 주도했지만, 1980년대 들어와 4대인 크리스토퍼(Christopher)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대에 걸쳐 거의 100년 동안 각각 광저우 중국인과 미국 및 캐나다의 중국인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처럼, 그와 아들은 국교 단절기 동안 서적 출판을 통해 중국과 미국을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그런 일이야말로 바로 선대의 위업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기독교적인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비즈니스적인 인연을 가진 것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할아버지가 추구하는 사역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헨리는 변화된 현실을 고려한 자신의 일이 할아버지와 고모 할머니들이 했던 사역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할아버지는 19세기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했다면, 나는 20세기에 가치 있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했다. 즉 성경을 중국 남부에 배포하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미국에 머물면서 아직 계몽되지 못한 신세대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세대의 선교사로서 우리 집안은 미국인과 중국인 모두를 위해 더 살기 좋은 것을 만드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할아버지처럼 해외에서 개종시키는 사역 대신에, 나는 미국 내에서 우상숭배, 돈에 대한 사랑, 권력의 남용 등을 극복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둘 다 우상 파괴라는 동일한 미션을 가졌다.”

잘 나가던 사업은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 정부에 의해 승인된 문헌 수요가 급감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줄었다. 2000년 이후에는 경영난이 심각해졌다. 2003년 하반기에 중국 외문국과 홍콩 연합출판사그룹이 연합해서 CB&P사를 인수했다. 채권 채무를 모두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노예스 가문을 배려한 인수였다.

회사의 명칭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43년간 경영을 해온 노예스 가문은 중국인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2004년 언더우드 4세가 한국을 떠났듯이, 1866년부터 시작된 노예스 가문도 2003년 중국서점의 매각으로 136년간 중국과의 공식적 인연이 끝나게 됐다.

▲노예스 목사의 후손들, 즉 4대손(Nicollete) 5대손(Kristina), 6대손(Sasha) 등이 배영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3대손 헨리는 몇 차례 광저우를 방문했다고 한다. 배영학교도 방문하고 고모 할머니들이 세운 진광학교와 정신병원을 둘러보기도 했다. 헨리는 2005년 사망했다. 헨리의 딸과 손녀들이 진광·배영·출판사의 기념 행사 시 여전히 중국에 초청받아 오지만, 개인적인 차원이다.

우리나라의 언더우드 가문과 중국의 노예스 가문 후손들이 걸어간 길은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교사의 후손들은 선대가 뿌린 씨앗이 숲을 이뤄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증인 된 자들이라는 점이다.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