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매년 사순절이 되면 늘 주님 지신 십자가를 생각을 하며 묵상합니다. 십자가는 원래 로마 제국에서 가장 잔인한 행악자들에게 사형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과 연결되었던 끈이 끊어져 버리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형벌을 받으심으로 단절되었던 끈을 연결해주었다고 교회는 고백합니다. 곧 단 한 번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과 완전한 화해를 이룬 최대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희생 번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구원과 승리의 상징이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은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메고 감으로써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주님을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또 다른 하나는 ‘네가 동일한 죄를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고백하여 주님께 확실한 구원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같은 십자가를 지고도 한쪽 강도의 십자가는 멸망의 길로, 한쪽 강도의 십자가는 승리의 길로 인도되는 것을 성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십자가는 나무토막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며 또 다른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짐을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들의 양육 문제와 사회적으로 맡겨진 짐 뿐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병고와 질고, 그리고 불행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십자가에 포함됩니다. 고난과 승리, 영광과 짐, 이 모든 것이 부활 사건 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십자가는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절망이 없었다면, 부활의 승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어느 누구도 부활이라는 위대한 승리의 영광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모습의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지요? 교만과 자랑, 시기와 모함, 그리고 편가르기 등으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그러한 십자가는 그저 막대기일 뿐입니다. 절망의 십자가를 주님께 지게 하신 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 안에 있던 지도자들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핑계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고, 정말로 성도를 사랑하며 교회 미래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지는 십자가를 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행함의 십자가를 지시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부산 덕천교회,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