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24일
본문: 누가복음 7:47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747 법칙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누가복음 7장 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이긴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사랑이 먼저다!”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23절까지 말씀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첫 번째 열매가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가 순서로서 9가지 열매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고 나머지 8가지의 열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나를 내어서 불사르게 하는 희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고, 진정 우리 속에 있다면 이런 사랑의 실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죠.

오늘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원리를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사랑]에서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사랑이란 “747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 있는 말씀인데요,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마치 747 점보여객기가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747 법칙에도 엄청난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오늘 이 말씀은 제가 만나 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을 시작하던 초창기에 강력한 도전을 주었던 구절입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7장 36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시몬이라 불리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청하고 잔치를 베풀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잔치 중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초대받지 않은 한 여인! 그것도 누가복음 7장 37절에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 라고 표현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 자신도 삶이 부끄러웠는지 감히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3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몸을 파는 창녀였을 것으로 생각하죠. 그래서 추측하기를 요한복음에 나오는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던 여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목회자인 저의 처지에서 보면 무척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말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고, 그 말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소위 ‘가십’거리는 사람들의 좋은 먹이가 되죠.
무책임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목회에 치명적인가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모두 누군가의 오해와 근거 없는 말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본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특히 목회자들에게 ‘여자’ 문제라는 것이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 모릅니다. 특히 일찍 목회를 시작한 저에게는 늘 주의해야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의 나이도 30대 초반이고 아직 미혼인 상황에서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제가 만나 교회를 담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찬양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는 여자 청년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곤란하다고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분당의 이매촌 탄천 가에 위치한 큰 체육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누군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상담을 한 것이죠. 이야기를 하다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난감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죠. 머리가 벗어진 중년의 아저씨 앞에서 20대의 아가씨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그 상황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 이 여인의 모습도 예수님의 모습도 “그 무엇”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들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 대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고 되어 있지요. 어떤 번역본에는 이 부분을 “그녀의 눈물이 비 오듯 내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 눈물로 젖은 예수님의 발을 얼굴에 비비며 머리털로 흙먼지 묻은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어쩌면 그 여인의 유일한 재산이었을지 모르는 향유를 깨고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 단순히 수군거리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 말고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갑자기 출현한 이 여인 때문에 잔치의 초청자였던 바리새인 시몬의 심기가 무척 불편해진 것입니다. 그의 불편함은 시몬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인 “747 법칙”이 나오게 된 설명이기도 하죠. 누가복음 7장 44~46절입니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시몬아! 너는 나를 초청했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다. 네가 하지 아니한 일들을 저 여인이 하지 않았느냐?”
시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그것이 무엇일까요? 분명히 자신이 잔치를 베풀었고 이 상황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주변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도 종종 찾아오지 않나요? 우리는 돈과 시간과 열정을 다해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중요한 무엇이 빠져 있는 느낌 말입니다. 시몬이 생각하는 자신은 참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모든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 그래서 그는 친절하게 잔치를 베풀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경건성에 비추어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우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여인에게 예수님을 빼앗긴 것 같았을까요? ‘공허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물질을 희생하며, 자신의 집을 제공하며 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왜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자신인데 왜 이 거리의 여인보다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왜 이 거리의 여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녀에게는 있지만, 바리새인 시몬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잔치를 만들고 초청했지만, 예수님의 발을 씻을 정도로 겸손하게 사랑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사랑의 전제조건! - 747법칙
위에 질문이 무엇인가요?
“둘 중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 즉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시몬아! 네가 왜 그 죄 많은 여인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못하는 줄 아니? 너는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야!”
여기에 747 법칙이 적용됩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방탕하고 큰 죄를 지어야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죄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스스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쥐어짜내 사랑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오늘부터 우리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텐데, 얼마나 부담스러운 시간이 되겠습니까? 참 신기한 것은 멀리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이나 동남아시아에 있는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되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든지 말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은 되는데, 용서하면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않습니까?
종종 우리가 듣는 말이 있습니다. “저런 남자와 사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소리를 듣는 여자는 속으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 남자와 살아봐라. 행복한가?”
종종 우리는 남의 교회 목사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런 목사님과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저런 목사님과 신앙생활 해봐라. 행복한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의 도전이 무엇인가요?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 나와 도저히 관계가 깨어져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의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사랑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에게 자식을 주신 기쁨과 사랑보다 그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삶에서 정말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했지만,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사랑의 문제에서 실패자일지 모릅니다.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이렇게 힘들게 할까요? 뭔가 이 ‘사랑’에 실마리를 제공할 만한 것이 없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랑에 대하여, “747 법칙”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사랑의 첫 발자국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은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배우는 747 법칙에 의하면 사랑을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용서함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요한 1서 4장 19절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나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에베소서 4장 32절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누군가를 참 용서하기 힘들 때,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힘들 때,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힘들 때,
우리가 받은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세워주는 것이 힘들 때,
나를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도 시몬처럼 예수님께 문을 열어주고 잔치를 베풀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사랑의 열정이 식었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랑을 받아 본 자가 사랑한다!”라는 것이죠.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모든 영화와 드라마, 제품을 광고하는 CF조차도 사랑을 모티브로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나요?
그렇게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깨어지는 가정이 난무하고, 상처받는 우리 자녀가 그렇게 많고, 깨어지는 교회에서 당하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아픔, 같이 숨 쉬고 살아가야 할 군대에서 서로를 때려서 죽이고,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왜 그렇게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시대!
사랑하려고 하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을 할수록 사랑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시대!
이것이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랑에 굶주린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고 여러분과 함께 한 주간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사랑]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내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강권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수표를 남발하라고 권하면서 은행 계좌에는 입금해주지 않는 것과 같다. 너무나 많은 관계가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 마음에는 충분한 사랑이 없다.

순서가 분명하지 않나요?
요한 일서 4장 11절에서 더욱 분명해지는데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비결은 사랑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잠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준비하는 시간이 12월 24일입니다.
제 방에도 작은 나무이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이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밖에는 가장 아름답게 장식된 나무들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월이 지나가면 하나씩 나무들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왠지 아시나요?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생명력이 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무에서는 소나무 잎이 떨어질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럴듯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명력 없는 것은 드러납니다. ‘먼지’가 쌓입니다. ‘색’이 바라게 됩니다. 흉내는 내지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살짝 건드려도 넘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력을 공급받을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 어떤 사랑도 쉽게 넘어지고 깨어지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하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십시오!”

이제 한 주간 동안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인 “사랑 장”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이 사랑에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의 핵심은 4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세 번을 읽어보겠습니다.
한번은 말씀대로, 그다음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넣어서 말입니다.
사랑은(병삼은, 예수님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처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좋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런데 자기의 이름을 넣고 읽으면 너무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넣고 읽으면 가능해 보이지 않나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을 가능케 만드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말이죠.


사랑은 오래참고…
오늘은 한 가지만 실천해 볼까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첫 번째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하여 말씀이 시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의 시작입니다. 어쩌면 ‘인내’보다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아니, 실천하게 하는 것은 없을 듯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오래 참고’라는 말을 희랍어의 뜻을 가지고 설명하는데 아주 인상적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물이 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중이라고 한다면, 물이 끓는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열을 내는 스토브의 종류나 주전자의 크기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은 불꽃의 세기가 아니겠습니까? 불꽃의 강도죠. 불이 약하면 물은 천천히 끓습니다. 인내란, 이렇게 스토브의 불을 약하게 줄이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순진하게 상황을 모른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모른 척하고 참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불꽃을 약하게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물이 끓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분노의 불꽃을 약하게 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베드로후서 3장 9절)

만일 주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오래 참으실 이유가 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하셨던 말씀과 아주 유사한 구절이 마태복음 18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빚진 자와 회계를 하는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그의 식솔들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 사람은 빚을 갚을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 가운데서 왕께 나아와 애원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주었더니” (마 18:26~27)
여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소서”라고 인내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맥스 루케이도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길게 늘어선 줄에서 오래 잘 참는 정도의 덕목 이상이다. 인내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길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같은 것이다. 만일 인내가 없었더라면 자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그가 법정을 나서자마자 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에게 단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목을 틀어쥐고는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동료가 똑같이 엎드려 구합니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29~30)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왕이 이렇게 참아 주었는데 그가 그렇게 인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은 자신이 베푼 인내와 사랑에 전혀 감동하지 않은 사람, 즉, 자신이 받을 형벌에 대하여 면했다고 안심했을지 모르지만, 은혜에 감동하지 못한 사람을 옥졸에게 넘기고 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이 베푼 은혜를 이 사람이 정확히 이해하지도,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인내를 경험했다는 증거는 다른 사람을 통해 그의 인내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747 법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신이 받은 것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중요한 것은 왕의 인내를 받았으나,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그가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참으시는 인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았지만, 왕이 베푼 인내를 가슴으로 깨닫지 못하면 그 인내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내하는 사랑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얼마나 나를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을 내 가슴속으로 알고,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래전 인터넷에 떠돌던 [3초만 기다려 보자]라는 글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자.
정말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발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크락숀을 누르지 말고 3초만 기다려 주자.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을지 모른다.

내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서서 기다리자.
그 사람 아내가 정말 아플지도 모른다.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보고 있어주자.
혹시 그놈이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 줄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아침 뉴스에서 불행을 맞은 사람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내가 화낼 일이 보잘것없지는 않은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3초만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그 아이가 크면 분명 내 아이에게도 그리할 것이다.

죄짓고 감옥 가는 사람을 볼 때 욕하기 전 3초만 생각하자.
내가 그 사람의 환경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울상을 하고 있을 때 3초만 말없이 웃어주자.
잘못을 뉘우치며 내 품으로 달려올지도 모른다.

아내가 화가 나서 소나기처럼 퍼부어도 3초만 미소 짓고 들어주자.
그녀가 저녁엔 넉넉한 웃음으로 한잔 술을 부어줄지 모른다.

우리를 참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가 조금만 참아 준다면, 조금만 주전자가 천천히 끓을 수 있도록 분노의 불꽃을 줄이기 시작한다면 참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실천사항 만들기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참을지 그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참으신 것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을 것을 생각하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참아준다면, 또다시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와 증오로 뒤덮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참으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선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불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참음은 또한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있지 않을까요?
참으면 ‘망각’도 같이 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분노도 식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싸우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참는 것입니다.
참으면 그 화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래서 오는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누군가를 참아 줄 때입니다.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참아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참아야 할 분량을 생각하세요.
“747 법칙”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