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24일
본문: 빌립보서 1:27~30
설교: 이수영(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유럽의 첫 교회입니다. 바울이 환상 속에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 마게도냐로 건너가 유대인도 드물고 따라서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던 도시에 세운 첫 교회이니만큼 빌립보 교회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나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도움이 필요할 때 허물없이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였기에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였습니다. 자연히 그 교회가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바울은 다시 그 교인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 있었고 언제 풀려나서 다시 빌립보를 방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튼튼히 서있다는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첫 마디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합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말 속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신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고 하다가 그 때문에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고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면 쉽게 믿음을 버리고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을 확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을 굉장히 넓고 다양하게 적용하며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말로 "생활하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사실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라", "시민답게 처신하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는 여기서밖에 나오지 않는 이 의외의 동사형 단어를 사도 바울이 사용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그 말의 명사형 단어를 빌3:20에서 쓰고 있습니다. 즉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하는 문장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했을 때 그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일반적인 의미의 시민으로서 생활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빌립보 시민으로서 생활하라든가 로마인답게 생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에 시민권을 둔 사람으로서 생활하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군대의 전역군인들이 로마군대에 헌신한 대가로 로마시민권을 받고 살도록 허가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시민들보다도 더 로마적인 삶을 구가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의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인들처럼 옷을 입고 로마인들처럼 먹고 마시며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는 빌립보 시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그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시민권은 로마의 시민권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임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은 곧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하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7절 하반절과 28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 다시 가서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 직접 확인하든지 아니면 그렇게 못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하여 하는 말 두 가지를 전해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좋은 소문이 그에게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 한 뜻으로"는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자주 반복하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처럼 연합해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처럼 잘 연합되고 협력을 잘 해야 각 개인의 신앙이 성장할 뿐 아니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않으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자고 아무리 소리쳐봐야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두 번째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일이 이루어질 때 첫 번째 것은 더욱 빛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평온한 때는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협력하기 쉬우나 고난이 닥치면 갈라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은 교회의 연합을 깨기 위하여 모진 박해를 가하곤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를 거부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한 일로 말미암아 갈라진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한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이루는 길은 바로 모두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살면서 하나 되자고 하는 것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삶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곤 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을 믿기 때문에 닥치는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이 그 어떤 대적과 고난에도 두려움 없이 잘 견디며 믿음 위에 굳게 서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그런 소식을 듣고 싶어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잘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격려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난에 관한 그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28절에서 쓰기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한 후에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합니다.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것은 그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이고,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 때문에 오는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증거이고 이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멸망에 처해질 자들임이 틀림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은 반드시 패할 것이고 복음을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후1:5-9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영광을 누릴 하나님의 백성은 그 믿음을 바르게 지키려 할 때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복음을 대적하고 신자들이 환난을 당하게 한 자들은 반드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 5:10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사도 바울의 긍정적 사고는 계속됩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고난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 고난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같겠습니까? 주님의 그 고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 자체를 우리는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에서 소수 그룹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기독교인의 특권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기독교인들이 얻게 될 영광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롬8:18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될 때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크리라는 생각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그 대적하는 자들과의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빌립보 교회 신자들도 그 싸움을 싸워야 하고 바울 자신에게도 그런 싸움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함께 승리하기를 바라는 뜻을 전합니다. 본문 30절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싸움으로서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의 큰 선물인 믿음에 따라오는 고난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에 오는 고난이기에 우리가 은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것을 잘 견디는 것이 구원받은 이들의 증거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키며 살 때 온갖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다는 증거,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이며 모든 악한 적대세력의 패망의 증거임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악한 때에 더욱 더 복음에 합당한 삶을 힘씀으로써 악에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