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가끔 버스기사와 승객이 말싸움을 하는 장면을 본다. 어느 날 쉰 살쯤으로 보이는 버스기사와 또래쯤으로 보이는 승객 한 명이 서로 욕을 섞어가며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승객이 버스기사에게 한 펀치를 날렸다. 

“넌 평생 버스기사나 해 먹어라, 이 자식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승객들은 생각했다. ‘아, 버스기사의 패배구나!’ 버스 안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슬슬 버스기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버스기사가 소리쳤다. “넌 평생 버스나 타고 다녀라. 이 자식아!” 승객들은 다 뒤집어졌다. 당황한 승객이 화를 내면서 버스기사에게 소리쳤다. 

“문 열어! 열라고!…. 인마!” 그렇지만 버스기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체하며 계속 운전했다. 그러자 승객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다시 고함을 질렀다. “문 열어! 열라고! 내 말이 안 들려? 귀먹었어?” 그러자 기사가 소리쳤다. “벨 눌러, 자식아!!”

주변을 둘러본다. 정말 짜증나고 재미없는 세상이다. 남몰래 울고 있는 아내가 있다. 아내의 마음 하나 몰라주는 무심한 남편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그저 따뜻한 위로 한 마디, 격려 한 마디면 족한데, 그것 하나 못해주는 남편이 너무너무 야속해서 눈물 흘리는 아내.

나이 50에 들어선 중년 남성이 푸념한다. ‘지금까지 내가 뭘 위해 살았던고?’ 나이 들어 스스로를 돌아보니 서글픈 생각이 든다. 돈 버는 기계였던가?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분주하게 달려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사업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게 달려왔던 인생이 허무하다. 아이들은 제 잘난 맛에 살고, 열심히 달려왔지만 남은 게 별로 없다. 죽음이라는 것도 한 번씩 생각해 본단다.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은 했다. 그런데 몰려오는 인생의 서글픔을 어찌하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사추기인가?

몇 개월 전이었다. 세미나가 있어 지방으로 달려가던 중이었다. 혼자서.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을 노크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도대체 뭐하는 건가? 뭘 위해 이러는 거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52살이 된 나에게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순간,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문을 열어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사단이 틈타는 순간이니까. 그래서 생각의 문을 과감하게 닫아 버렸다. 지금까지 틈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쭈욱.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교회의 한 커플을 출발시켰다. 형제는 신앙생활한 지 4~5년 되었을까? 자매는 오래 전부터 우리 교회에서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다. 2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통해 대화를 나눠 보니, 앞으로 잘 살아갈 부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 이들의 행복 행진이 언제까지 이뤄질까? 많은 부부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들 말한다. ‘우린 처음부터 잘못 만났어!’ 처음부터 잘못 만났다고?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던가? 혹시 이렇게 생각한 건 아닐까? ‘이 사람 아니면 난 결혼 같은 걸 안 할 거야.’ 그런데 지금은 뭐란 말인가? 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니던가? 혹시 어제 결혼한 부부도 이 길을 걸어가지는 말아야 할 텐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보자. 어느덧 출애굽한 지 38년이 지났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변길을 갔더라면, 열흘 정도에 가나안 땅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야로 들어서서 벌써 38년이나 걸렸다. 기나긴 방황이었다. 다시 돌아온 곳이 전에 열두 정탐꾼을 보냈던 ‘가데스 바네아’이다. 38년 동안 광야를 빙빙 돌고 헤맸으니 얼마나 지치고 갈증이 심했을까? 

그런데 ‘마실 물’이 없었다(민 20:2). 정말 열 받는 순간이다. 재미없는 세상이다. 짜증스럽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로 몰려들었다. 왜? 지도자 모세와 다투기 위해서다. 백성들은 핏대를 올려 모세에게 대들고 시비를 걸었다. “진작 죽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 우리를 왜 이 광야로 인도해 여기서 다 죽게 하느냐? 우리를 그 좋았던 애굽에 놔두지 왜 이 나쁜 곳으로 인도했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죄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본래 이렇다. 늘 불평불만을 한다. 환경이 조금만 힘들어져도 원망하고 짜증을 부린다. 환경이 조금만 불리해지면 지도자를 욕하고 대든다. 환경을 탓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인간 본성에 충실한 사람은 늘 불평하고 다투며 살아간다. 본성을 따라 사는 건 동물적인 삶이다. 살맛나는 인생을 살려면, 믿음으로 인간 본성을 저항해야 한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본성을 거스르고 통제한다.

사람들이 환경 때문에 짜증을 내고 불평하지만, 문제는 환경이 아니다. 환경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얼마든지 달라진다.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문제가 생긴다. 믿음은 환경을 재창조한다. 불행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던 환경들이 변했다. 행복의 문이 열렸다.

물론 광야이니 ‘나쁜 곳’일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과정’에 불과하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늘 그렇지 않은가? 과정은 힘든 거다. 힘든 과정 없이 좋은 결과를 맺는 걸 봤는가? 그런데 과정을 갖고 힘들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 과정에서 소중한 건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모세가 처한 기가 막힌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싸울 건가? 권력과 힘으로 꽉 눌러 버릴 것인가? 모세와 아론을 보라. 그들은 ‘회중 앞’을 떠났다. 더 있어 봐야 분통만 터질 일이다. 좋은 소리 들을 것도 없다. 이들을 잠재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럴 때는 소란한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혹시 싸움을 거는 사람이 있는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그렇다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래야 죄를 짓지 않는다.

차라리 모세처럼 ‘회막 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엎드려야 한다. 회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이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 문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임했다. 여호와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의 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거면 족하다.

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어느 세미나를 갔다 왔다. 둘째 날 오전 집회 후 기도 시간을 길게 주었다. 그때 강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소란스러운 기도도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였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로 시작했다. 5분도 채 못 되어 나도 모르게 중보기도로 들어갔다. 아파하는 지체들의 얼굴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들을 내 가슴에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만져주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①‘내가 안다!’ ②‘내가 있다.’ 주님의 임재 앞에 서 있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코에서 나온 콧물과 범벅이 되어 손수건을 다 적셨다. 재미없는 세상. 그렇지만 살맛나는 인생이 바로 거기서 경험되어졌다. 회중 앞에 버티고 있으면 재미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회중 앞을 빠져나와 회막 문으로 가서 엎드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라. 살맛나는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게다. 그게 영적 세계의 신비감이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게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