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서론>
“나는 누구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편안할 때는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그러나 심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을 때 살고 싶은 욕망이 사라질 때 도대체 내가 누구냐, 산다는 게 무엇이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내가 누구냐. 절망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러느냐. 죄책과 절망을 지울 수가 없는 인간이고 허무와 무의미를 안고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죽음과 무의 절망에 처해 있으므로 사람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가 누군가 알려면 내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물론자들, 인본주의자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아메바에서 왔다고 합니다. 아메바는 이만한 병균 아닙니까? 현미경적인 균에서 진화가 되어서 내가 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까 사람이 가치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잘나게 보여도 아메바가 무슨 큰소리 하나? 벌레보다 못한 인생, 그렇게 되면 형편없지요.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문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부터 현대의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던졌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본론>
1. 나는 어떻게 이 땅에 지으심을 받았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나는 어떻게 이 땅에 지으심을 받았나?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근원적인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태어난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우리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메바에서 진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차이의 가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메바로 태어난 사람은 조상이 벌레와 같은 균이기 때문에 칭찬도 하지 않고 가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구나. 어쩌다가 어렵게 된 사람이지만 가치가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하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왜 삽니까? 밥 먹고 사는 것이 인생 전부입니까? 제가 폐병 걸려서 피를 토하고 집에 있을 때 아버님께서 내게 와서 야, 인생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먹다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슬퍼하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그때 아버지가 생각하는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먹고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이 먹고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무슨 의미가 더 있겠지. 그것밖에 없을 것이냐. 그런데 요사이 사람들이 와서 저에게 이 세상에 왜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말과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먹다가 죽으려고 살고 있다. 성경에는 이사야 43장 7절과 21절에 분명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하고 사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과 21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은 것은 우리를 곁에 데리고 있어서 대화를 같이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될 것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곁에 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지은 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 찬양하기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같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면 여러분이 인생에 태어난 보람이 있고 목적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실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늘 노예생활을 하고 압박을 당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철학자가 인생이 누구냐.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인생이 무엇이냐, 먹다 자다 죽는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이냐, 나는 누구냐. 이래 뵈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 닮은 사람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태어났느냐.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곁에 있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가 섬기고 살 목적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를 주시고 죽음을 죽지 않고 영생하게 만들어 주시니 하나님 안에서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는 살지 못하게 만들어졌습니다.

2. 서로 의지하도록 지으심을 받음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으로 지어 놓으신 것입니다. 제일 먼저 보면은 창세기 2장 18절로 22절에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이것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야훼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만들어 주시면서 같이 살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하와를 데리고 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같이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혼자 있는데 있겠다는 말은 안했습니다. 두세 사람 있는 곳에 내가 같이 있겠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하나님과 같이 있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함께 있으라고 했는데 이들이 함께 있지 않고 따로따로 놀았습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마귀하고 이야기할 때 아담은 어디로 갔는지 없습니다. 여러분,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를 하나님은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그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 밑에 하와가 마귀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아담이 하와야, 이리 오너라. 마귀하고 이야기하면 안돼! 빨리 이리와! 그렇게 도와주었어야 될 것인데 벌써 가정 싸움을 했는지 하와 혼자 있어요. 그러니까 마귀가 아담하고 같이 있을 때 오지 아니하고 하와 혼자 있을 때 와서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과를 보라. 저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서 하나님처럼 되고 만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까 싶어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마귀의 꾀임에 의해 이미 빠진지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기 한지라. 따서 그냥 먹고 그 다음 늦게 어슬렁 어슬렁 남편이 오니까 이리 오세요. 이리 오세요. 이것이 선악과라는 것인데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대. 아담이 안 그럴건데? 먹으면 죽을 건데? 그냥 먹어 보라고 그냥 받아먹으라고 강제로 그냥 입에 밀어 넣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그냥 타락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맡깁니다. 내 탓이 아니고 네 탓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하나님 탓이고 하와 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여자, 하나님이 안 지어 주셨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인데 하나님이 지어 주신 그 여자가 나에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그러므로 이 탓은 하나님 탓이고 하와 탓이고 나는 책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와 보고 왜 그 실과를 먹었느냐. 마귀가 꾐으로 먹었나이다. 마귀 탓입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난 다음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 드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병들고 고통을 당하고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라. 부부간에 동등하게 살아야 될 것을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고 구박하고 여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는 큰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디 봐도 고통이에요. 땅은 저주를 받고 부부간의 사이는 이제는 다스리고 지배하는 사이가 되었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곡식을 내지 아니하고 병들어서 아프고 죽는 비극이 다가왔으니 인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이 잘못되고 하나님께 쫓겨났으니까 범사가 저주 받아 안 되고 강건하지 못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워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의 품에 보내셔서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33년 동안 마지막 3년반 동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져주고 우리의 허물을 대신 값고 우리의 병을 대신 앓아 주시고 우리의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할 때 그 땀이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심히 당하면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을 통해서 피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피가 흘러내리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 가운데서 사시다가 인간이 당한 가장 비극적인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될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100%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죄를 90%만 청산하고 10%는 너가 갚으라고 하면은 안 돼지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자가 없다고 한 것처럼 여러분의 죄는 100% 영원히 청산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병도 주님께서 100% 대신 짊어지셨고 저주와 가난도 100% 책임지고 사망과 음부도 100% 책임지셨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비슷한 신앙을 가진 교파가 있지요.

카톨릭 교황이 오셔서 지금 아주 의기양양하고 얼마 안 있으면 온 한국 땅이 카톨릭땅이 될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이 옵니다만 세계적인 훌륭한 분이 오셨으므로 우리가 손님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들이 믿는 교리하고 우리가 뭐가 다르냐, 그것을 사람들이 자꾸 제게 묻습니다. 날 보고 하신 말씀이 말 잘못하다가는 큰일 나니까 말은 아끼면서도 무엇이 다른지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우리 신교는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써 예수를 믿음으로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사람이 플러스 마이너스 보탤 것 없어요. 예수님이 전적으로 우리를 책임지셔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람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카톨릭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와 같습니다만 100%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한 10%는 사람의 선한 일을 해서 공을 세워야 구원을 얻는다는 그러한 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조금 틀립니다. 그러므로 카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연옥으로 내려간답니다. 연옥에서는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 했는가 그것을 분별해서 낙원으로 올라갑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우리가 죽으면 천사에게 끌려서 직접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의 품인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연옥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낙원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이 재림했다가 우리를 부활시킬 때는 그 다음 천국으로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앙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한 평생에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연옥에 들어가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전적으로 예수님이 내가 90% 이루었다. 10% 너희가 맡아서 해라. 그것 나는 모르겠다. 그러고 세상을 뜨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으면 우리는 먹고 마시고 마음대로 살자. 그렇게 해야 될 것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았으나 상급은 행위로써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천당에 가서 계급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한대로 주님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도록 반드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노력은 상급을 받는 노력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 곳에 들어갈 때 여러분이 상급을 받고 영광의 광채를 안고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여려가지 다른 점이 많지만 구원론에 있어서 이와 같이 틀립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를 믿으면 전적으로 예수님 덕분으로 천국가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공로를 세워서 주님의 구원에 보탬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너무나 영원한 하나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기에 주님이 주는 은혜는 다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용서를 주시고 영원한 성결함을 주시고 영원한 치료를 주시고 영원한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진리를 깨달았으면 마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성경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시고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구원을 주셨는데

3. 예수님의 대속으로 달라진 나의 배경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율법을 행함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영원히 죄사함을 통해 거룩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로 1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여기 보십시오. 영원한 제사입니다. 매일매일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한방에 끝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제사지낼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를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해주었다. 여러분, 영원히 예수님 안에서 온전케 되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구원은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은 구원받은 여러분이 상급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상급을 쌓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주님을 가까이 하고 닮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써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심신의 병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 같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서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현재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 몸속에 들어오면 몸속에 들어가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치료할 것은 치료하고 낫게 할 것은 낫게 하고 이 말씀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번주간에 자매님 한분이 신앙상담을 와서 하는 간증을 듣고 놀랬습니다. 그가 상담에 위암에 걸렸는데 위암이 전이가 되어서 간암이 되고 간암이 전이가 되어서 장암이 되고 장암이 전이가 되어서 자궁암이 되고 온몸에 암에 쫙 퍼졌어요.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해보니까 이것 도저히 나을 수가 없고 죽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는 것인데 그러나 조금이라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떼낼만한 것은 떼내 보자고... 그래서 그 자매님은 우리교회 교인이 아니고 텔레비 방송을 통해서 매일 저의 설교를 들었는데 조목사님 설교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만 번 쓰라고 했는데 나도 이것 만 번 써볼까? 그래서 노트를 구해서 연필을 가지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 소리를 내면서 쓰는데 만 번을 못 쓰고 몇천 번을 썼는데 손가락이 다 벗겨졌어요. 그렇게 열심히 이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수술 받을 날자가 되어서 준비하기 위해서 병원에 입원해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의사들이 와~ 다 고함을 쳤습니다. 온 몸에 퍼졌던 그 암이 줄어들어가지고서 보일락말락 합니다. 자기도 깜짝 놀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는 줄 몰랐다. 그래서 조금 남아있는데 그것은 수술로 떼어내자고 하는데 떼내는 것보다 목사님께 와서 안수기도 받고 하나님 능력으로 깨끗이 낫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그래서 제가 안수를 하니까 아주 기분이 좋아요. 여러분들도 성경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말씀이 뭐냐.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거든요.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말씀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으므로 하나님 말씀을 필요할 때 받아들여서 그것을 자꾸 외우십시오. 자꾸 외우고 감사하면 그것이 운동력이 있어서 온몸에 들어와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말씀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치료와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저주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우리 이것도 읽어 보십시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저주가 들면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분명하게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여러분은 예수님을 의지하면 저주가 없어요. 저주를 주님께서 다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저주가 광풍같이 오면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폭우가 쏟아지면 예수님은 폭우를 가리우는 것같이 되고 마른 땅에 냇물같이 되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같이 된다. 예수님은 철저히 우리를 축복해 주기 위해서 고통을 몸으로 막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영생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여러분과 나를 위한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이 거처를 예비하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게 예비해 놓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살 곳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낡은 피조물은 죄의 종이요, 허물의 종이요, 병의 종이요, 저주와 가난의 종이요, 죽음의 종인데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 죽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했으므로 이 종의 멍에를 끊어버렸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의로운 거룩한 병을 고치고 건강한 축복을 받아서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영생복락을 받은 자녀로써 당당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열등의식과 좌절감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절망에 이르는 병든 자도 아니고 죽음에 이루는 병든 자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있고 건강이 있고 거룩함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에 새로운 우리 자화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냐. 그러면 여러분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내가 누구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당당하고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4. 말을 바꾸라
말을 바꾸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자화상을 얻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 되었어도 이것이 표현되는 것이 전부 말로써 표현되는 것입니다. 말을 잘못하면 신앙생활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꿔야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말이 뭐와 같으냐. 큰 폭풍일은 바다에 배가 항구를 향해서 가는데 누가 그 항구에 가도록 만들어 놓느냐. 배 밑에 있는 안 보이는 곳에 있는 키가 배를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붙잡고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여기 키입니다. 혀가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 키가 되는 것입니다. 말이 막 달려오는데 말을 어떻게 조정하는 것입니까? 쇳조각을 입에 넣어 놓고 쇠조각을 당기므로 말을 조정하는 것처럼 여러분 인생을 조정하는 것도 혀에서 말로써 조정하는 것입니다. 불씨가 잘못 간수하면 온 도시를 태우지 않습니까? 혀는 잘못 사용하면 온 인생을 불태우는 불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도 말로써 나타내고 꿈도 말로써 나타내고 믿음도 말로써 나타내고 축복과 저주도 말로써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우리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주를 지으셨습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생겨나라. 물이 갈라져라. 다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운명과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말로써 지어가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하는 말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여러분이 말을 다스리지만 일단 여러분 입에서 나가면 말이 독립을 해서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까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과 대화해야 되고 마귀하고는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그리스도 이름과 그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마귀는 말로써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써 이웃을 축복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을 주거나 옷을 주지 않아도 말로써 축복하면 그 축복이 가서 그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공부 잘해라. 건강해라. 훌륭하게 살아라. 너는 참 똑똑하다. 축복을 해주십시오. 이웃도 축복을 해주십시오. 우리 한국 사람이 세계 OECD 국가 중에서 제일 행복하지 않은 것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구라파 사람에게 “Are you happy?” “I''m happy.” 그래서 한국 사람은 당신 행복합니까? 아휴 계면쩍게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노. 몰라요. 한국 사람은 그렇게 대답을 해요. 그런데 왜 그러느냐. 연구한 논문을 제가 읽어 보았는데 구라파 사람들이 영어는 행복하다는 말을 하기가 쉬워요. “Are you happy?” 행복합니까? “I''m happy.” 나는 행복합니다. 아주 말하기가 쉽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므로 행복한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 말이 쉽지가 않아요.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 사람들 부정적인 연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당신 행복합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꼭 선생같이 말한다. 당신 행복합니까? 행복 한들 안 한들 묻기는 왜 물어요? 당신 행복합니까? 행복이 어디 있어? 당신이나 행복하시오. 한국 사람들은 행복을 인정하지 않아요. 말로써 행복을 부인해 버리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안 행복한 민족이 한국민족이라고 논문에 나와 있어요. 내 질문을 한번 들어 보세요. 여러분 행복합니까? (아멘) 아멘이라고 하지 말고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행복합니다.) 말을 하시니까 좋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나는 꼭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만사가 형통하다. 그렇게 긍정적인 말을 해야만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람을 축복해주는 말을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보고 늘 말을 해야 돼요. 자기가 자기를 보고 늘 말을 해야 될 것은 너는 기쁘다. 너는 행복하다. 너는 좋은 일이 생겨난다. 너는 건강하다. 너에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 늘 입술로 말을 하면 그 말이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러분 정말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각도 말을 해서 나타나잖아요. 꿈도 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꿈꾸고 가슴에 감추고 있었으면 안 되지요. 자기 형제들이나 부모에게 자기가 꿈꾼 것을 자꾸 말했습니다. 말이 나가서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여러분 자신을 보고 늘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고 말하는 것은 감사와 찬양이고 마귀 보고 말하는 것은 쫓아내는 나가라 물러가라고 말하고 이웃보고 말하는 것은 축복을 말해주고 자기에게 말하는 것은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올바르게 하면 굉장한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그 말이 내일의 여러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축복을 받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무기를 주셨는데 말이 그 무기인 것입니다. 말로써 여러분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하고 성공적으로 나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은 영과 혼(마음)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마귀는 항상 육체를 정욕으로, 육체를 꾑니다. 마음에는 교만과 탐욕으로 유혹하는데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한 사람이지만 세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의 사람, 혼의 사람, 육의 사람이 지금 여러분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육의 사람은 육신의 감각과 세속과 쾌락을 따라가고 그래서 육의 사람이 여러분을 점령하면 세속에 속하고 술 먹고 담배 피고 방탕하고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혼의 사람이 여러분을 점령하면 혼의 사람은 과학과 이성을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유물론적, 인본주의적인 곳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영의 사람이 여러분을 주장하면 영의 사람은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여러분도 하나님과 똑같이 영의 사람이 되어가지고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감사하고 말씀이 영의 양식이니까 먹고 즐거워 하고 찬미하고 영적인 일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배당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까 여러분은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물론자는 혼의 사람이 일어나면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의 사람이 유혹하면 육의 사람을 대적해서 물리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 알아야 될 것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가만히 있으면 여러분의 행위도 자연적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성령이 주시지만 여러분이 싸워야 성령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기고 의, 평강, 희락이 생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열매는 여러분이 가만히 있는데 맺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열매를 맺겠다고 노력하고 애쓸 때 성령이 도와주셔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도 한 가지인 것입니다. 술주정뱅이가 예수 믿었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그날로부터 술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은 그대로 있는데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술을 이기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내가 술하고 대적하고 싸우면 성령이 도와주셔서 술을 끊는 것입니다. 도박하는 사람은 정말 제가 도박에 미친 사람을 봤는데 미친 것 한단계 넘어서 걸치게 되어요. 다스릴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나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예수 믿게 되면 도박이 다 하고 싶은 것이 떠나갈 줄 알았는데 미쳐요 미쳐! 교회에 가서 앉아 있어도 도박만 생각나지 설교는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나는 이래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 믿는데 왜 도박을 하려고 하느냐. 나는 예수 믿는데도 도박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이지요. 예수 믿었다고 해서 도박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도박을 떨어뜨려야 되겠다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도와주셔서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여러분을 싸울 때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수단을 주었지 가만히 있는데 도박이 떠나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모두다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말합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보혜사! 보혜사라는 의미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항상 함께 계시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도와주는 이가 있는데 도와주려면 내가 뭘 해야 도와주지 아무것도 안하는데 도와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 거짓말 안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미워 안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도박 안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방탕 안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대결하고 일어나면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로써 성령과 그런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기고 지는 것은 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이기고 허물을 이긴다고 계속해서 말하면 성령이 그 말을 통해서 죄와 허물을 무장해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 튼튼하다. 씩씩하다. 병을 이겼다. 계속 말하면 여러분 병은 물러가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축복받는다. 가시와 엉겅퀴가 떠나갔다. 저주는 물러갔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 나는 형통한다. 늘 그 말을 하면 그 말이 바로 그를 만들어 내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말을 여러분 잘 사용하면 여러분 팔자를 고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되어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014년 8월 17일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