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17일
본문: 열왕기하 20:1-11
설교: 김병삼(만나교회 담임)
제목: “잃어버린 은혜, 되찾은 은혜” - 히스기야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열왕기 하 20장 1-11절]

1.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7. 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9.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10.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니다 하니라
11.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자 동시에 하나님께 질책을 받은 사람입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던 것은 자격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히스기야는 유대의 제13대 왕으로 ‘아하스’의 아들이며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 나라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히스기야를 잘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과 그의 삶의 발자취는 현재의 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결과이기 때문이죠.

첫 번째, 히스기야의 삶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그가 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지 6년 만인 31세 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본 것이죠. 때로는 원수였지만, 때로는 연합하던 미워할 수 없는 형제간의 두 나라가 아니었습니까? 예언자의 말씀대로 한 나라의 운명이 끝나는 것을 보며 히스기야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그가 놀란 것만큼이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두려움 가운데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단을 제거하고 성전의 제사를 회복했습니다. 또한, 백성이 감사 제물과 첫 열매,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교육하고, 가장 중요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의 온 성은 큰 기쁨이 가득 차고 백성이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역대하 30장 26~27절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

두 번째, 히스기야가 겪은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가 앗수르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방금 보았던 것처럼 종교를 개혁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던 유다는 교만해졌습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죄악이지만, 앗수르의 처지에서 봐도 더는 놔두면 안 될 것 같은 경계심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 하 18장 13~16절 말씀에 보면,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겁을 먹고 앗수르의 왕에게 사람을 보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물러가겠습니까?”
이제 앗수르 왕이 참 어려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했는데,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하지만 산헤립은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히스기야를 농락합니다. 그제야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듣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의 종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에 엎드려서 통곡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열왕기 하 19장 35절에 보니까,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역사가들은 18만 5천 명이 한꺼번에 죽은 이유를 “급성 전염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앗수르는 물러가고 유다를 침략하고 하나님을 조롱했던 왕 산헤립은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세 번째 사건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때에”로 시작하는 이 말씀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가 언제인가요?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한 가장 큰 적이었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지 14년, 그의 나이 39세가 되던 해입니다. 한 창 일할 때입니다. 어쩌면 그의 삶에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을 때입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의 집을 정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그가 신실했는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생명을 거두어 가리리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는 선언은 히스기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다가올 가장 정확한 사건입니다.

히스기야는 역대 임금 중에 칭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서 신앙과 예배가 회복되었고 우상이 제거되었습니다.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도 위기를 넘기며 다윗 왕에 버금가는 왕으로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이며, 그의 삶에 찾아온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 아니면…
오늘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인데, 히스기야에게 있었던 사건인 보편적 은혜를 주관적 은혜로 바꾼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위기 가운데서 삶의 태도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히스기야에게 다가온 삶의 위기가 본문 1절에 나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병이 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잠시 거쳐 가는 병이 아니라 점점 병이 중하게 되면 심각하게 원인을 찾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라는 말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병이 들어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는데 더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런 왕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하는 말이 “네 집을 정리하라!”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선지자가 와서 죽음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체념할 수도 있지만,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히스기야의 병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지금 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히스기야의 상황이 “보편적 은혜” 가운데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죽음의 상황은 보편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경고가 심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심판을 받지 않도록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히스기야를 기억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위기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은 가장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기도보다는 원망을 택한다는 것을 아시나요?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 기도의 순간이 보편적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한 주관적 은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첫 번째 정당성은 자기의 공로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
두 번째 기도에 해당하는 것은 그의 통곡입니다.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아주 흥미로운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나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의 통곡을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통곡이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고 긍휼하심을 얻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봐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 성경의 번역본을 봐도 “기도를 듣고 (listen to his prayer) 그의 “통곡을 보셨다.”(observe)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렇게 설교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업적이 아닌 눈물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핵심입니다!”
그러면 참 많은 사람에게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이야기할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다 듣고 보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바로 특별한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가 살아온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우리 중에 누구도 자격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제가 참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것 아시잖아요!”라고 기도할 수 있다면 조금은 체면이 서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흘리는 눈물이라야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눈물을 “보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삶으로 그의 생명을 연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이죠.

마이클 야코넬리의 [영성]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사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울타리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국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전쟁터에 시신을 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흰 울타리를 친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교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친구의 시신을 공동묘지로 옮겨가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해가 지기 전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가 굽고 야윈 노 신부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깊게 주름이 파이고 햇볕에 그을린 신부의 얼굴 가운데 지혜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번쩍이는 두 눈이 마치 밝게 빛나는 창문처럼 보였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묘지에 묻어 주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지만 아주 서툰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 없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러자 노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렇지만 교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다. 일을 다 마쳤을 때는 해가 떨어지고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다음 날 아침 전선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 작은 교회를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은 교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어젯밤 지치기도 했고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말에 노 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젯밤 당신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울타리를 옮겨 놓는 그 이상의 일을 하셨다. 아예 울타리를 없애 버리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긴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울타리를 만든 사람들은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은혜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 추측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을 받고, 15년 동안 생명이 연장을 받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히스기야가 왜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지 못했느냐는 것이죠.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삶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인데, 혹시 그의 기도의 응답을 착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기도했던 것처럼 그의 공로 때문인 줄 알고 자기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내용을 다 다룰 수 없으므로 열왕기하 20장 말씀과 평행구절인 역대하 32장 2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24.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25절에 “마음이 교만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그 교만의 증거가 무엇일까요?
당시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바벨론의 왕 브로닥 발라단이 편지와 예물을 히스기야에게 보냅니다. 병이 나은 히스기야는 그의 사자들에게 궁정의 모든 보물을 보이며 자랑합니다. 병이 나은 히스기야의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자기가 쌓은 업적을 자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참 간사하지 않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나음을 얻었는데, 낫자마자 자신의 것을 자랑하는 치졸한 졸부의 근성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만한 자의 목을 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히스기야가 믿음이 있었던 사람인 것은 그 순간에 바로 회개하고 “교만함을 뉘우치고”(26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부분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살았던 것을 보아 주세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는데 그 긍휼이 혹 자신의 공로로 얻은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교만해진 것은 아닐까요?

“교만”이라는 놈은 우리가 조금만 방심해도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믿음의 고백이 그치는 순간 공로가 교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신앙이란 외줄을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잘 간직하기 위해 영적으로 긴장해야 한다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공로를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의 공로로 천국에 간다면 천국이 천국이 아닐 것 같습니다. 천국에는 온갖 잘난 척하는 사람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믿음의 공적을 쌓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의 삶에 대하여 명백하게 심판하시는 것은 그가 은혜받은 자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히스기야 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잘 깨닫게 되는 듯합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지만, 우리의 삶도 보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삶을 내세우기를 원치 않으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적의 사건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8절의 히스기야의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죠.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그러자 9절에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 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해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아는 것, 즉 해시계를 말합니다. 이 해시계는 항상 그림자가 나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 도를 나가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지구의 자전이 빨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이 멈추었다가 다시 뒤로 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히스기야가 요청한 징표를 다 보여 주셨습니다. 11절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고, 과학자들이 성경의 이 이야기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기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기적에 취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순간 기적은 독이 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예화를 사용했더군요.
한 명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그 선물만 만지작거리며 쳐다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그 선물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서 그 선물을 준 사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물론 후자입니다. 선물을 받고서 선물을 쳐다보기보다는 그것을 준 자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이런 선물을 주셨는가 하면서 선물 준 사람을 감사의 눈빛으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선물을 준 자보다는 선물만 쳐다보고 있었던 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남 유다 왕 히스기야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가장 명확한 표현인 듯합니다.
히스기야가 받은 선물이 얼마나 귀합니까?
히스기야 인생에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은혜의 선물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리는 것을 은혜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로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와 은혜를 거두어 가시는 때는 아주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병 고침을 받고 15년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겸손함과 눈물이었습니다. 또 한편 히스기야에게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을 때, 바벨론 손님들은 왜 왔습니까?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서 도대체 어떤 비결이 있길래 나았는가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히스기야는 자기의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을 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간증해야 하지 않습니까?

히스기야가 자기에게 재물도 주시고 자기의 생명을 15년 연장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충만하였을진대 어찌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소개를 아니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보화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전부가 되십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의 심중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보물고의 재물만 보여주며 자랑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선물을 주었는데, 이 선물만 바라본 것입니다. 이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왜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생각지 않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물질에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14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1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 여호와의 말씀의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왕하 20:14~18)

얼마나 무서운 선언입니까? 다 빼앗아 간다는 말입니다. 주신 선물만 집착하며 쳐다보고 이것을 주신 하나님은 생각도 안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어리석습니까?

나에게 시간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고 자녀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신 내용물보다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하였는지 주신 하나님보다는 축복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축복만 바라보지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변질해가는 안타까운 현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진리요,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