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8월 17일
본문: 빌립보서 1:12~26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꼭 5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그 당시는 굴욕적인 한일외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에서 연일 그치질 않을 때였습니다.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잡혀간 것입니다. 대부분의 단순가담자들은 하루 만에 훈방되었는데 웬일인지 저는 풀어주질 않았습니다. 요주의인물로 분류되어서 법원으로 송치될 것이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직전에 경찰에 몸담고 있던 먼 친척 중 한 사람이 손을 써서 이틀 후에 풀려나왔습니다. 정식 감옥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데서 며칠 지내보니까 참 심정이 산란해짐을 경험했습니다. 빨리 나가지 못하면 학교는 어떻게 될지, 집에 알리지도 못했는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혹시 재판에 넘겨지기라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지 등등 걱정이 안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가족의 생계나 크든 작든 회사나 기업을 책임진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구속상태에서의 심경이 얼마나 착잡할지 짐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몇 차례나 감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또 이미 세운 교회들을 순방하며 돌보아야 하고 또 가난한 교회들에게 구호금도 전해주어야 하는 등 할 일이 많았던 바울에게 옥에 갇혀 꼼짝할 수 없는 상태는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 아니라 재판을 받고 풀려날지 아니면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서는 불안한 마음도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옥중에서 그가 어떤 마음의 상태에 있었는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글 속에는 답답하다, 힘들다, 괴롭다, 불안하다, 못 견디겠다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본문 18절 끝에서 쓰기를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옥중에 있는 그를 기뻐하고 기뻐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전파의 진전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에 진전이 있다는 것이 그를 옥중에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합니다. "형제들아" 한 것은 빌립보 교회의 남녀 성도들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한 일"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가 투옥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가 옥에 갇힌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옥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투옥이 새로운 전도의 장을 열어주었고 뜻하지 않았던 전도의 대상들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합니다. "시위대"라는 것은 왕궁이나 총독부에 주둔하는 호위부대를 뜻합니다. 바울의 투옥 때문에 복음이 오히려 감옥 안까지, 그 감옥이 있는 시위대 안과 그 시위대가 있는 왕궁이나 총독부 안에까지,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알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써 그가 복음을 전하러 다닐 수 없게 된 대신 복음을 들을 새로운 대상들이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옥중에서의 사도 바울의 기쁨의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많은 이들이 바울의 투옥 때문에 오히려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들입니다(본문15절). 그들은 사도 바울을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사람으로 알았으며 그가 옥에 갇혀서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리라도 열심히 전도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나선 사람들입니다(본문 1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쁜 일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쓰기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한 것입니다. 본문 15-17절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 글에서 우리는 한편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착한 뜻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투기와 분쟁으로" 하고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옥중에서도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늘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바울을 따르는 이들과 다른 분파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키며 바울에 대한 교인들의 신뢰와 사랑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틈을 타서 전도를 열심히 하여 교인들에게서 명성을 얻고 자기들의 추종세력을 키우려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은 감옥에 갇혀서 전도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믿고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본문 17절).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듯이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동안에 자기는 전도를 못하고 있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다른 것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만 전파된다면 전파하는 이들의 동기나 방법이 위선적이건 참되건 가리지 않고 기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이 그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복음의 전파에 진전이 됨을 확인하고 기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의 동기와 방도가 어떠하든지 개의치 않는 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든지 못나가든지, 그리고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조차도 개의치 않는다는 생각에까지 미칩니다. 그런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본문 20-26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그냥 살고 죽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어떻게 살며 왜 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만이 그에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본문 20절)라고 쓰고 있듯이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부끄럽지 않게 예나 지금이나, 자유로울 때나 옥에 갇혀있을 때나 한결같이 온전히 담대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판을 받아 풀려나거나 혹 처형을 당하게 되더라도 재판대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주저주저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로 인해 존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살고 죽는 문제를 초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본문 21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그의 삶의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존재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만 하면 더 바랄 것 없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만 하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에게서 죽음은 그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본문 23절). 단 그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삶일 때 그의 죽음 또한 유익한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컷 내 맘대로 살았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멀어도 너무나 먼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하며 그리스도의 말씀만 따라 살고 그만을 전하다가 죽어야 그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뜻입니다. 살아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산 사람에게는 죽음은 그 연합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합의 보다 깊은 경험에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비록 자기가 훨씬 더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지만 살고 죽는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 22-24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 바람직한 죽음을 택하기보다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유익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여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5-26절입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 19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가 풀려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석방을 주시고 조금 더 삶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6절에서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하는데 여기서 "너희 자랑"이라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자랑이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다시 같이 있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자기로 인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 알고 그것을 자랑할 줄 앎이 더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확실한 사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도 오직 그리스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던 사도 바울은 삶은 오늘까지의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살아도 나, 죽어도 오직 나뿐인 그런 삶이 우리가 바라고 실제로 추구하는 삶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것이 기쁘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성령께서 힘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