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최근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하나님의 뜻’ 발언이 교계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에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은 21일 서울 한국기독교선교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문창극 사태의 쟁점과 전망’을 주제로 한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일종의 찬반 형태를 띤 이날 대담에는 방인성(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오세택(두레교회) 목사가 반대 패널로, 서충원 사무총장(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권문상 교수(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가 찬성 패널로 참여했다. 그 주요 발언들을 정리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인가?”

방인성: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하나님 뜻’ 발언은) 세월호 참사를 당한, 굉장히 예민한 시기에 나왔다. 그의 신앙관 또는 역사관을 종합해 볼 때, 그가 과연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인가 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창극 씨가 당시 조선인들을 매우 게으르다거나 더럽다고 표현했는데,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그렇게까지 일반화시킨 이유를 모르겠다. 또 부패했던 것은 일반 백성들이라기보다 주로 지도자들이었다.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특히 가난한 데서 부유해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나라를 잃게 된 것이 우리의 잘못 때문인가, 아니면 일본이 악해서인가. 우리는 이것을 분별해야 한다. 모든 고난을 다 ‘내 잘못’으로 해석한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마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종교적 패권과도 같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세택: 문창극 씨가 말한 ‘하나님의 뜻’은 한국교회가 전형적으로 말해 온 서사구조를 띠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뭐냐? 우리는 원래 못살았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잘살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서사의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전혀 아니다.

또 일본을 ‘하나님께서 쓰셨다’라거나, ‘피폐한 우리나라를 일본이라는 채찍으로 치셨다’는 등의 해석보다는 ‘하나님께서 (일본이라는) 악을 내어 버려두셨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로마서 1장 24절에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자칫 공격을 정당화시키는 패권주의로 흐를 수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사회를 맡은 김종희 대표(뉴스앤조이), 방인성·오세택 목사, 서충원 사무총장, 권문상 교수. ⓒ김진영 기자

“일제 정당화 한 게 아닌, 하나님의 시련으로 본 것”

서충원: 이번 논란의 핵심은 문창극 씨의 발언이 과연 식민사관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명확하게 아니라고 본다. 식민사관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발언은 ‘일제 강점으로 인한 수난은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시련이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를 정당화한 게 아니라 하나의 시련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제라는 몽둥이를 드셔서, 불의와 부패가 가득했던 당시 조선을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악으로 가득했던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데 있어 보수와 진보진영 사이에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보수진영은 하나님의 뜻을 개인적 신앙고백 차원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크다. 따라서 국가나 민족의 문제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 한다. 일제 강점이나 6.25 전쟁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으로 보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셔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신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진보진영은 하나님의 뜻을 사회정의와 연결시킨다. 그렇기에 다소 보수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 문창극 씨의 발언이,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는 진보진영에게 비판의 여지를 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화와 소통이 더욱 필요할 것 같다.

권문상: 신학적으로 정리할 때 ‘하나님의 뜻’에는 일종의 ‘이중성’이 있다. 하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와의 소통 속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시는 섭리다. 문창극 씨는 아마도 전자에 좀 더 방점을 찍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흐름을 그 분의 주권 하에 움직여 가신다는 믿음일 것이다.

또 강연 내용을 보면, 이분이 어떤 구도 속에서 논리를 전개해 나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과거 우리나라는 불평등과 폭정 속에서 백성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결국 정신이 피폐해졌지만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가 그와 같은 정신을 해방시키고 근로의욕까지 고취시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걸 말하려다 보니 (강연의) 앞부분에서 ‘게으르다’ 등의 (기독교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들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차원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