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의 부름은 온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인간의 타락이 바벨탑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을 흩으신 다음 보잘것없어 보이는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다. 부름받을 당시 아브라함은 내놓을 만한 이력서가 별로 없었다. 나이도 75세의 노년이었으며(창 12:4), 자식마저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창 11:30). 더구나 그가 부름을 받은 가나안은 물이 부족한 곳으로, 유프라테스 강변의 하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다 나은 곳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살기 어려운 삭막한 땅 가나안으로의 역이민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은, 고향을 떠나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창 12:2). 고향은 그동안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곳으로, 분신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터전이다. 아브라함은 그런 고향을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으로 가야만 했다.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신뢰로 순종하며 고향을 떠났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살아왔던 지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나 잠시 머물렀던 하란은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위치한,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당시 그곳은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던, 세계의 중심지였다. 그에 비하여 가나안은 사막에 인접한 지역으로, 문명의 외곽지역이다. 또한 그곳은 정기적으로 기근이 찾아오는 물 부족 지역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런 지역으로 불러내신 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 불편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시겠고 약속하셨다. 큰 민족의 약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 하나는 자손 번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민족이 살아갈 땅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땅이 없는 자손 번성이나 사람이 없는 땅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중심축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약속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 해결 차원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보다 더 큰 신학적 함의가 있다. 곧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으로의 부름은 아담의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과 신학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마려해 주시고 그 땅을 경작하며 지키라는 명령을 주셨다(창 2:15). 아담은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풍성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땅이 되었다. 사람은 평생 동안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창 3:17). 땅은 더 이상 인간에게 풍성한 삶을 보장하는 복의 근거가 아니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은,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땅을 경작해야 하는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것은, 새로운 의미의 에덴동산을 회복하시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가나안 땅이 지닌 신학적 의미이다. 외형적 조건으로는 에덴동산과 가나안 땅이 닮은 곳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에덴동산은 물이 풍부한 낙원이었는데, 가나안 땅은 사막 주변에 위치하여 물 부족을 겪는 메마른 땅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역행하면서까지 애굽으로 피난길을 가야만 하였던 것도, 가나안 땅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가나안 땅을 신학적으로 에덴동산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에덴동산의 풍부한 수원은 겉으로만 보이는 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물 흐름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것은 겉으로 보이는 물이 아니라, 내적으로 흐르는 영적인 물의 추구였다. 곧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렘 2:13). 그것은 영적 훈련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적 훈련을 위하여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것이다. 훈련의 최종 목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외형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가나안 땅은 주변에 위치한 사막의 영향으로 늘 물이 부족한 메마른 땅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땅 밑에 하나님의 영적 수맥이 보이지 않게 흐르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에덴동산이다. 다만 그것이 영적인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 영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가나안 땅에서 새롭게 시작된 아브라함의 후반부 인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의 목적은 신앙의 성숙이고, 신앙의 성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덴동산의 발견을 지향한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생수의 근원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한 일이 사라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구입한 것이라는 성경의 기록도, 그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막벨라 굴 구입은 외견상 부인인 사라의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나안 땅을 향한 아브라함의 열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앞서 쟁취하는 적극적 자세가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