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가셨습니다.
이전 그 어떤 교황보다 환영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천주교인들이 가장 기뻐하였고,
자신들의 신앙과 교단에 대하여
자부심과 우월감과 책임감을 많이 가졌으리라 여깁니다.

그분은 참된 영적 지도자가 교권을 가졌을 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는 종이 되어야
존경과 영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어
성도들을 빛과 소금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개신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교인들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개신교는 만인제사장직을 믿는 종교개혁의 신조에 따라 모든 성도들이
교황이나 사제와 같은 영적 지위에 있다고 믿고
이를 타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앙적 진실을 목도할 때에
그분을 존경할 만한 진정한 주의 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향해서 한 강론이
그의 진정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지 드러내 밝히실 때,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봅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중략)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중략).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 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중략)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설교-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주교단에게, 2014. 8.14. 저녁>

그러나 한 가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 그렇게 많은 종파와 교파와 성직자와 성도들이 있고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정치가와 행정가와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있을 진데
그간 무엇을 하였기에
남북간의 평화와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그렇다고 쳐도 
세월호 사건조차 해결 치유하지 못하고
그분께 매달려 위로를 구하는 것인지 부끄럽기만 하였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6.25 때에 남쪽은 유엔군에 의존하고
북쪽은 중공군에 의존하여 제 나라 문제를 제가 해결치 못한 것처럼
교황에게 의존하는 형국이 된 것은 아닌가
큰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주연>

* 오늘의 단상 *  

무슨 일을 하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화평을 이룩하십시오.
인생의 정원에 꽃이 살아날 것입니다.
<이주연>

* ‘산마루서신’은 산마루교회를 담임 이주연 목사가 매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들을 그가 직접 찍은 사진과 특유의 서정적인 글로 담아낸 것입니다. 이 목사는 지난 1990년대 초 월간 ‘기독교사상’에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펜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온라인 홈페이지 ‘산마루서신’(www.sanletter.net)을 통해, 그의 글을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