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교황이 되어 천명한 소신이다. 세계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식 사목방한 일정을 14일부터 18일까지 마무리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지 25년 만이다.

교황을 맞이하는 광화문 광장은 대단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월드컵 응원행렬보다 더했다. 미리 초청장을 받은 17만명의 신도들은 금속탐지기와 소지품 검사를 거쳐 방호벽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입장하지 못한 주변인원까지 합하면 50만명은 족히 된다고 한다. 정말이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런저런 사고로 웃지 못할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차량 충돌 사고가 일어나는가 하면, 더운 날씨에 탈수 현상까지 가져왔다.

연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신문과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소란하고 요란스러웠다. 사람들은 교황 만세를 불렀다. 순간 베드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주목할 때, 그 주목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그런데 교황 만세라니?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광화문 광장에 몰려든 인파들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이 내 눈에 보였다. 가톨릭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 아울러 한국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가. 한국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일치된 가톨릭의 힘과 분열된 한국교회의 현실, 너무 부끄럽다. 사분오열되어 서로 다투기나 하는 한국교회. 형제 자매니, 영적 가족이니 하면서도 고소·고발장을 남발하는 한국교회.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도저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의 현장. 누구도 죽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하는 한국교회. 그런 교회를 이번 광화문 광장에 결집된 가톨릭의 힘과 비교하면 너무 가슴 아프다.

일부에서는 장로교회의 연합을 위한 모임도 주선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과연 우리의 저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는 결코 연합을 이룰 수 없을 텐데. 그런데 가톨릭은 하나로 뭉쳐 있다. 연합된 그들의 저력이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비쳐졌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는 분열과 다툼에 물든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으니, 언제쯤이나 한국교회는 연합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환영 연설을 통해 진심 어린 바람을 표명했다. “교황님의 방한이 오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반도에 희망의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방한 기간 우리 사회가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도모하고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가며,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교황님의 기도를 부탁드린다.”

우리의 바람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해갈지. 그 여파가 얼마나 큰 반향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미 세월호 사건으로 침몰된 한국 사회의 경제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통일의 문을 열어젖혔으면 좋겠다. 교황의 입에서 거듭 강조된 평화와 화해의 바람이 사회 전반에 불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 너무나 허약한 한국 개신교회의 자화상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교황이 방한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한국교회는 많은 걱정을 했다. 개신교인 50만명 정도가 천주교로 개종할 것이라나? 그만큼 교황의 인기가 지대하는 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런데 분명한 건 한국교회가 이렇게 허약하다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강했다. 체질적으로 멋있었다. 사회를 선도했다. 정신적 지주였고 리더였다. 사회를 향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교황의 방문으로 무너질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쩔쩔 매야 하는 신세가 되다니? 정말 걱정스럽다. 언제까지 이런 유약한 체질로 걱정해야 하는지? 진작 성도들을 진리로 무장시켰더라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한국교회가 건강성을 회복했더라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이번 기회를 통해 천주교의 허구성이 드러났으면 좋겠다. 성경에서 벗어난 가톨릭의 부실이 더 실체를 드러냈으면 한다. 어떻게 교황이 무오한지? 어떻게 인간의 선행이 구원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 마리아가 어떻게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가톨릭도 성경에서 벗어난 길에서 돌아서길 기대해 본다.

이참에 개신교도 개혁의 바람이 불었으면 한다. 개혁교회는 계속해서 개혁해야 한다. 교회가 달라지면 빼앗길 것 때문에 우려할 게 없다. 그들이 한국교회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거듭나는 용트림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학도, 삶도 계속해서 개혁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붙은 별칭들이 많다. 가난한 자의 대부, 빈자의 성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 길거리 사도. 뭔가 하나로 묶이는 게 있지 않은가? 이게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반성문이 되고 있다. ‘가난한 자의 대부’에 비해,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이 걷고 있는 길은 청빈과 가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날 개신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싸움을 보면 대부분 돈과 결부되어 있는 게 아닌가? 돈에 대한 탐욕이 결국 교회의 영광을 땅에 떨어지게 만들고 있다.

한국교회는 앞다퉈 화려한 건물을 짓느라 분주하다. 상황과 현실이 따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하나 믿고(?) 멋진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건물이 경매에 붙고 있다. 그 경매 물건을 매입하는 게 누군가? 바로 극성을 부리는 이단들이 대들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할지?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되는 교황의 시복식에서 일부 교인들이 소란을 피웠다는 말이 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특히 교황의 축복을 받기 위해 머리를 내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긍정적 효과를 낳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도 이런 반응으로 교황 방문을 제지하려 드는지? 이 정도의 미성숙한 반응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얻을 만한 게 없다. 좀 더 성숙된 반응이 필요하다. 복음으로 차별화된 윤리적 삶을 드러내야 한다.

교황은 사회를 향해 말했다. ‘독백을 하지 말고 대화를 하라!’고. 소통 없는 불통으로 정치가 시끄럽다. 대화가 없는 독백으로 사회는 끊임없는 사건을 연출했다. 더 이상 불통의 줄을 끊어버렸으면 좋겠다. 이제는 독백을 멈추고 대화의 장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예수님은 소통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가난한 사람들 뿐 아니라, 만인의 친구가 되어 독백이 아닌 대화의 문을 열어주셨다.

이 사회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떠들썩한 교황의 방한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떠들썩하게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말 뿐인 십자가가 아니다. 말 뿐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실천적인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