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석 목사(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과 어두움인 무지가 타작되어 거룩해진 성도들로 존재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 모두에게는,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에서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한다. 이 은혜와 평강이 없으면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이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목적이기도 하다.

‘은혜’는 ‘헤쎄드()’인데, 은혜·은총·자비·책망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때로는 “좋은 말씀 듣고 갑니다”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은혜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은혜의 올바른 개념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인 하나님의 잣대에 매달려, 사람의 잣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차꼬를 채워서, 어두움인 무지가 깨트려져 소멸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은혜는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은혜 위에 은혜로 덮어 나가야 한다. 은혜에서 벗어나서 은혜가 고갈되면 그 순간부터 어두움인 무지가 엄습해 오게 된다.

하나님의 잣대인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 가두어 놓고 육의 속성인 어두움인 무지를 고난과 아픔을 통해 깨트려 나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은 어두움인 무지를 죽여 나가는 고난과 아픔 때문에 은혜 밖으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 안에 거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량없으신 사랑 안에서 값없이 은혜의 길을 열어 놓아 주셨건만, 어두움인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짐승의 속성에 안주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고 원수를 맺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과 어두움인 무지가 타작되어 거룩해진 성도들로, 생명으로 부활하여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불러주신 것이다. 이렇게 불러주신 자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에서 나온 은혜에 갇힌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은혜를 받은 자와 은혜 밖에 있는 자와는 하늘과 땅과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은혜 안에 차꼬가 채워져 있는 자는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늘들에로 들림받아 올라가게 되고, 은혜 밖에 있는 자는 무저갱의 얼굴들인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지식의 빛을 받지 못한 채 짐승의 속성을 가지고 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속에 자신을 계속 집어넣어야 한다. 은혜에서 벗어나서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생명의 얼굴로 부활한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이 소멸되고 어두움인 무지의 지옥의 얼굴로 전락하게 된다.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이 점점 소멸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이 점진적으로 확장되어야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왕국에는 육의 속성인 어두움의 얼굴을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평강’은 ‘샬롬()’이다. 평강, 평화, 평안, 번창이라는 뜻이다. 그냥 현상적인 개념으로 만사가 평안하다는 말이 아니다. 은혜와 평강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은혜 안에 차꼬가 채워져 있게 되면 평강은 필연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분들 가운데는 서로 문안 인사를 ‘샬롬’이라는 단어가 “안녕하십니까”라고 문안 인사하는 정도의 내용이 아닌데도 표면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속에 차꼬를 채우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시기 위해서다. 마음땅의 어두움인 무지가 죽고 생명의 부활이 되어야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된다.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는 것은 고난을 통한 영적인 싸움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어두움인 무지를 정복한 자만이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있다. 생명의 부활을 한 자에게만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있게 된다. 육의 속성인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는 고난과 아픔을 통과하면서 싸우던 전쟁이 끝나야 참된 평화, 평강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이 평강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주는 평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여섯 걸음을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도 나와 같이 생명의 부활을 하여 나의 평강이 있으라’는 말씀이다.

평강이 없으면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모든 인간들의 마음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 주는 평강이 없고, 생명을 소유해서 누려보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생명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겠는가?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의 진리를 증거해도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강퍅한 마음인데, 거짓 증거로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된 자의 사명 감당하는 자세가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이론만 가지고 지식을 배운 것만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바리새인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있다.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육의 속성인 어두움인 무지를 철저하게 깨트려 죽여야 한다. 낮아지고 낮아지는 요단강을 건너야, 무지가 완전히 진압당하고 정복되어 먼지가 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생활은 죽는 훈련을 반복해 가면서 생명의 부활이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죽지 않으면 생명의 부활은 없다. 동시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로 나오는 은혜와 평강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죽고 생명의 부활을 한 자가 되어야 평강이 이루어진 생명의 존재가 된다. 그래야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있게 할 수 있다. 나에게 존재하는 생명을 생명이 없는 자에게 꺼내주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자로서 빚을 탕감받게 된다. 이것이 첫째 시기에서 여섯째 시기 안에서 어두움인 무지가 죽고 생명의 부활을 하여 구원이 완성된다는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이 생명의 빚을 탕감받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잣대로 하나님의 잣대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서균석 목사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늘교회(통합) 담임목사 은퇴
한국히브리신학원 학장

문의: 010-3728-0245
홈페이지: http://www.koreahebr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