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켓 여자의대 옛 건물.

현대 중국 여성들은 독립적이고 자존감이 높다. 당돌할 만큼 자기표현도 잘 하고 책임감도 강해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전문직 여성들이 많다. 의료 부문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대학병원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 의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여(女)의사들의 기원은 어디일까?

1899년 중국 최초의 여성 의대인 해켓의대가 광저우 서관에 있는 장로교회 1층에 세워졌다. 설립자는 북미장로회 의료선교사였던 메리 풀턴(Mary H. Fulton, 1862-1927)이다. 풀턴 선교사는 명심서원을 세운 메리 나일스 선교사 다음으로 중국에 들어온, 두 번째 여성 의료선교사였다. 풀턴 선교사 역시 박제의원의 여성 병동을 맡았고, 여성전문 의료진 양성을 절감해 해켓여자의대를 설립했다.

당시 박제의원 원장이던 켈 선교사가 1898년 정신병원을 설립해 방촌으로 건너가면서, 박제의원 내 남화의학원의 30여명 남학생들을 데려갔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교과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남게 되었다. 풀턴 선교사는 중국인 여의사 2명과 남은 5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에게 여성들을 위한 의학을 가르치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1879년부터 박제의원 부설 남화의학원에서 여학생들도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녀가 같이 공부하던 남화의학원은 여의사들을 길러내기에 전문적이지 못했고, 수도 제한적이었다. 봉건사상 때문에 당시 여자들은 아파도 병원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서양 남자 의사에게 산부인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제의원에 부녀전문 병동이 있기는 했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용감한 여성 의료선교사

▲최초의 여자 의대를 설립한 메리 풀턴 선교사.

메리 풀턴 선교사는 1884년 펜실베니아여성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해 북미장로회에 의해 광둥으로 파송되었다. 오빠 알버트 풀턴(Albert Fulton) 부부는 4년 전 이미 광둥에 와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인 메리 나일스 선교사를 만나 박제의원을 소개받았다.

풀턴 선교사는 매우 용감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시 선교사가 한 명도 가지 않던 광둥성 북서쪽 광시성 개평에 진료소를 개설할 정도로 용감했다. 중국인 통역과 진료 조력자인 메이 야꾸이의 도움을 받아 흙집으로 된 2개 방을 임대해 진료소를 열었다. 메이는 박제의원에서 의료 훈련을 받은 충실한 동역자였다. 1886년 5월 새로운 병원을 설립해 대대적인 진료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곳 유생들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 의해 병원은 불탔고, 풀턴은 가까스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광저우에서 풀턴 선교사의 명성은 자자했다. 1889년 11월 어느 날, 그녀는 광둥성 고위 관리로부터 절박한 요청을 받았다. 광저우에서 300마일 떨어진 산토우에 사는 82세의 노모를 치료해 달라는 것이었다. 풀턴 선교사는 수일이 걸린 끝에 산토우로 가서 사경을 헤매던 환자를 살려냈다. 이로 인해 그녀는 광둥성 관리들과 가족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여성 전문 의료사역의 가치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풀턴 선교사는 1887년부터 1901년까지 14년간 1,400여 차례나 농촌 지역 순회진료를 할 정도로 적극적인 농촌 의료사역을 펼치기도 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메리 풀턴 선교사(왼쪽).

중국 최대 여성 의료선교 센터를 구축하다

풀턴 선교사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오빠 알버트 부부의 도움을 받았다. 처음부터 여자의학교와 여성 전문병원을 겸한 여성의료선교센터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오빠가 목사로 있던 봉원당교회 1층에서 의료 교육과 병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외래 환자 병실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미비했다. 풀턴 선교사와 오빠 알버트 목사는 미국 장로회와 재미 중국인 화교에게서 6천 달러를 기부받아 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인디아나주 해켓(E.A.Hackett)이 도움을 주었다.

1900년에 진료실과 병실을 갖춘 교회 건물을 세웠다. 기부자 이름을 따 해켓여자의대라 불렀다. 그리고 1902년 다시 해켓의 기부로 여성과 아동 전문병원을 세웠다. 해켓여자의대 부속병원인 유제의원이다. 연이어 간호훈련학교도 설립했다. 1926년에는 남중국에서 유일한 제약학교도 설립해 3학교 1병원 체제가 되었다. 센터 내 교회를 세워, 1930년대에는 중국에서 여성을 위한 최대 의료선교센터로 성장했다.

풀턴 선교사는 1915년 여성의료선교센터에서 물러났다. 퇴직할 때까지 60여명의 여성이 4년제 교과 과정을 마쳤고, 약 50명의 학생이 정규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풀턴 선교사는 1915년 중화의학회 초청으로 상하이로 가서 2년간 여성 질병, 신생아와 아동 질환, 간호 매뉴얼 등과 관련된 의학 서적의 번역과 저술을 맡았다. 1917년 선교사 은퇴까지 34년간 중국 여성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27년 65세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여성과 아동 전문병원이던 유제의원은 해켓의대 부속병원이었다.

중국 관리들도 인정한 여자의대

해켓여자의대는 19세 이하의 미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성경 과목을 필수로 의술을 가르쳤다. 영어와 라틴어도 같이 가르치는 등 커리큘럼이 엄격했다. 1904년 3년제에서 4년제로 바뀌었고, 1929년 다시 6년제로 바뀌었다. 초기부터 의대 건물 2동, 병원 건물 2동과 30개 병실로 출발했다. 병원 설비와 전등을 모두 최신식으로 갖추어 광둥의 관리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방문했다. 미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을 올 정도였다.

입학한 학생은 엄격하고 실용적인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은 부속병원에서 임상에 참여하거나, 풀턴의 대형 진료소와 수많은 가정 방문 진료에 따라다니며 의술을 익혔다.

해켓여의대는 당시 많은 공공기관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졸업식에는 유력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주미 중국대사가 졸업식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 양광 총독도 참석해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1912년 졸업식에는 중화민국 손중산 초대 대통령도 참석했다. 중국 선교 역사에서 여자 선교사가 만든 의료교육기관이 중국의 관료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은 특이했다. 해켓의대 졸업장에는 광둥성 정부의 공식 직인과 주광저우 미국 영사의 서명이 동시에 들어갈 정도였다.

해켓의대는 31회까지 여의사를 배출했으며, 졸업생 수는 246명이었다. 졸업생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동남아·미국·프랑스까지 다양하게 취업을 해서 나갔다. 해켓 의대의 응시자 수는 나날이 늘어났다. 해켓의대생들은 고위층들에게 인기가 좋아, 재학 중 결혼하는 사례도 많았다. 풀턴 선교사는 부득이 재학 중 결혼 금지와, 결혼하면 공부할 수 없다는 엄격한 규제책을 내걸기도 했다.

▲해캣 여의대생들이 함께한 모습.

전족 금지운동

헤캣의대가 1901년 정식으로 건물을 준공해 입학식을 열었을 때 홍콩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1901년 4월 23일은 광둥의학 사상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성 전문 병원과 여성 의학교 출범은 이 도시의 수많은 여성들과 아동들에게 영원한 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했다.”

치료가 가능한 병임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생을 포기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전용의대와 부속병원 설립은 단지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속박당한 채 자유가 없던 여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여자의대 설립이 당시 봉건 사회에 던진 파문은 컸다.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정규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에서 여성들이 일반 교육을 받기 시작하자, 각계에서 압력을 줬다. 더구나 서양 의학을 여성들이 공부한다는 사실에 사회적 마찰이 더 심했다. 여성들은 중국 전통 사회에서 복종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자기주장은 중국 전통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여자들은 전족이라는, 몸의 굴레마저 있던 상황이었다. 풀턴 여사는 학교 운영 뿐 아니라 전족금지운동이라는 여성해방 운동도 활발히 펼쳤다. 이미 법에서는 금했지만, 전족은 사회 분위기상 교양과 미의 상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다. 전족 금지운동은 청말 여성해방운동과 맞물려 있는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기독교 학교에서 훈련받은 많은 여성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굴레를 뒤집어 쓴 것도 모른 채 운명처럼 살아가던 중국 여성들에게, 서양에서 온 전문직 여성 선교사들의 용감한 태도는 파격이고 혁명이었다.

▲처음 해켓의대를 연 봉원당교회 옛터에 세워진 십보당교회.

엄격한 종교적 신념

풀턴 선교사는 종교적 신념이 단호하고 투철했다. 그녀가 키운 간호사와 의사들 중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례를 받았다. 1901년 입학식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것은 의학이 기독교 정신의 아름다운 열매이지만, 의학의 실천이 기독교 외과 의사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의술은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 영생을 찾도록 하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이후에도 여러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대학의 목적은 기독교 여성 의사들을 훈련시켜 그들의 고향 등 여러 곳으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졸업생들은 우수한 의술을 익혀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물론 공중 위생 지식을 각 가정에 보급하여 환자들에게 예방하고, 간단히 치료하는 방법들을 전파할 것입니다. 현재 여자의대는 중국 내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사람, 여성의 지위를 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 이교도 가정에 구원을 전하고자 하는 자 등 모두를 공감하게 할 것입니다.”

풀턴 선교사는 기독교 정신, 현대 의학, 중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 격상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을 고양시키는 일을 기독교 여자의과대학이 행해야 할 목적으로 보았다.

▲광저우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 서관의 여만호 호수공원에 있는 수로 풍경.

서관에 남아있는 여성전용병원

여자의대와 그 부속 전문병원이 들어선 곳은 광저우의 서관이다. 서관은 옛날 광저우성 서문이 있던 일대를 일컫는 통칭이다. 서관은 본래 광저우가 시작된 곳으로, 광저우 사람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 광저우의 전통 문화와 정서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서관의 반당로(泮塘路)에 들어서면 여만호 호수공원이 펼쳐진다.

꽃으로 장식한 예쁜 배도 보이고, 광저우 사람들이 즐겨 먹는 길거리 음식들도 즐비하다. 서관은 상서관과 하서관으로 나뉜다. 최초의 성경번역이 이루어진 13행 주변은 하서관이라 불러 상업지로 유명했고, 더 위로 올라가면 상서관이라 해서 부호 상인들과 서민들이 모여 사는 주거 지역이 있었다. 상서관은 소담스런 일상이 있는 곳으로 여성, 아동 등 가정과 연결되는 사역들이 많이 펼쳐졌다. 풀턴 선교사도 이곳에 여성전문의대와 부속병원을 세운 것이다.

작고 오래된 집과 화강암이 깔린 골목을 지나노라면, 광둥의 오페라라 일컫는 월극의 흐드러지는 소리가 오후의 정적을 깨고 들려온다. 그 거리에서 ‘유제의원 옛터’라고 적힌 반가운 표지판을 만날 수 있었다. 표지판 뒤쪽으로 광의3의원이라는 병원이 보였다. 광의3의원 전신이 유제의원이었다. 현재 광의3의원은 여성전문병원이 아닌 종합병원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전통을 이어받아 산부인과 계통으로 유명하다.

병원 안에는 현대식 건물들과 오래된 건물들이 함께 빚어내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현대식 병원 중심동 옆에 오래된 빨간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돌아서 가 보니 임호당이라는 건물이었다. 안내판은 이곳이 유제의원의 옛 자리임을 알려줬다. 1936년 해켓 의학교는 박제의원의 남화의학원과 합쳐 영남대학에 편입됐다가 중산대 의과대로 병합되었다. 1930년대 웅장했던 해켓 의료선교센터 교육 기관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병합됐고, 부속병원만 남아 옛날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제의원 옛터 위에 세워진 불임센터 복도에도 해켓의대생들의 실습 장면 등의 사진이 걸려 있어, ‘열린 역사 전시관’처럼 보인다.

최근 임호당 건물과 신관을 연결시킨 생식센터가 문을 열었다. 불임센터를 말한다.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세미나가 열리나 싶었는데, 불임센터를 찾은 환자들이었다. 인구 대국 중국이지만, 최근 완화되기는 했어도 가정 단위로 보면 한 자녀밖에 낳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불임 환자들도 점점 늘고 있다.

센터 로비 벽에 창립자인 메리 풀턴 선교사와 초창기 원장들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기실 벽면에도 이 병원의 역사와, 여자 의학생들의 실습하는 장면,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병원 로비에 ‘열린 역사 전시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뒤편 허름한 건물 벽에 ‘since 1899’라 적혀 있었다. 본관은 파손되었지만, 유제의원이 시작될 때부터 같이 했던 부속 건물 같았다.

서관에 밤이 찾아왔다. 얼후를 뜯으며 서관 동요를 부르는 할아버지와 유유히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들은 서관에 오면 자신 안의 좋은 것들을 꺼내놓을 줄 안다. 그래서 일까, 서관에는 친근하고 소탈하며 낙천적인 광둥인들의 본성이 남아 있다. 계수나무향이 하얀 가운을 닮은 듯 나풀나풀 대지로 내려왔다. 복음이 아픈 여인들의 마음을 덮어 주듯이. 나의 사랑 어여쁜 자여 일어나 함께 가자.

/김현숙 집사(<시님의 빛>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