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6월 12일, 순천 매실밭에서 유병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경찰은 노숙자인 줄 알고 별로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그러다 7월 22일 유병언이 변사체로 공개되었다.

그동안 40일간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어 유병언 추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그가 변사체로 발견됨으로 너무 허탈하게 끝나고 말았다. 대통령은 다섯 번이나 지시했다. “빨리 잡으라!”고. 지금까지 없었던 엄청난 현상금을 내걸었다. 경찰과 검찰이 총출동해서 찾아 나섰다. 심지어 군 병력까지 동원됐다. 거국적인 눈초리로 감시했다. 그런데도 못 잡았다. 좁은 대한민국에서 사람 하나 잡는 게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그러다 보니 국민들은 반신반의해서 수군거렸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거 아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유병언의 시신을 보는 순간, 우리는 허탈했다. 그동안 죽은 시신을 쫓고 있었단 말이야!

유병언이 훼손된 시체로 누워있지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불신은 증폭되고 있다. ‘진짜 유병언 맞아? 자살이야? 타살이야? 아님 자연사야? 도대체 뭐야? 수십억의 도피 자금은 어디로 사라졌어? 일찌감치 죽었는데, 그동안 쇼를 한 거 아냐? 경찰이 노숙자로 알고 40일간 현장을 방치했다는 게 말이나 돼? 그동안 그의 도피를 돕던 손길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홀로 방치된 채 변사체로 숨져 있어? 한 달 이상 연락이 끊겼는데, 그렇다면 유병언의 측근들은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초동수사가 아무리 엉터리여도 그렇지, 일부러 모른 체한 거 아냐? 정말 의심스럽다!’

진짜 유병언이 맞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유병언의 죽음으로 쾌재를 부를 사람들에게 미소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이권이 돌아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차명계좌에 돈을 챙기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미소를 지을까? 평소 유병언과 돈으로 연결되어 있던 정치인과 종교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유병언과 권력 다툼을 일삼던 구원파 내부의 일단의 무리들도 화장실에서 환희의 미소를 짓겠지? 이제 내가 post-유병언이라 자처하고 나서겠지? 어둠의 자식들이 웃음을 뚝 그치도록 밑바닥까지 드러내주기를 당부한다.

헛되고 헛되다! 구원파에서 하나님으로 추앙받던 교주. 강연이나 설교 때마다 ‘왜 저러지?’ 할 정도로 자신의 건강을 자랑했다. 그런데 마지막이 어땠나? 한반도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하더니, 전남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부패한 시체로 드러누워 있어? ‘허름한 행색으로 봐서 노숙인 같았다.’ 신으로 추앙받던 그가 노숙자로 오인될 정도라니? 정말이지 ‘끝’이 달랐다. 이게 헛된 것을 쫓아가던 인생의 마지막이다.

하나님의 시야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 경찰과 검찰을 그렇게 교란시키며 숨바꼭질을 했지만, 결국 유병언은 비참한 변사체로 드러누워 있었다. 아무리 숨바꼭질을 해도 영원한 숨바꼭질은 없다. 용인의 한 오피스텔에 은신해 있던 유대균도 결국 잡히지 않았는가? 또 다른 관련자들도 잡힐 게다. 검찰은 철저하게 찾아내 엄격하게 조처해야 한다.

설혹 검찰이 찾아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다. 이 땅에서는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심판대에는 한 오라기도 숨길 수 없다. 세상 법정을 무서워하기 전에 하나님의 법정을 두려워해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욕망의 끝은 비참했다. 73세. 아직 많이 남지 않았나? 엄청난 재산.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추종자들. 한반도 땅을 다 삼키고, 한반도 은행의 모든 돈을 다 삼킬 정도로 그칠 줄 몰랐던 욕망. 그런데 그게 깊은 늪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해서 자기 배를 채웠던 악한 자의 최후가 이렇게 비참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지 않던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프랭클린은 말했다. “돈이란 훌륭한 하인이기도 하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 실로 돈은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다. 돈이 있으면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걸 뭐든지 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 돈이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돈은 우리를 치사하게도 만들고, 당당하게도 만든다. 돈은 마음도 부패시키고, 양심도 마비시킨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돈 몇 푼 쥐어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대행해 준다. 대리모도, 청부살해도. 심지어 최후 양심의 보루로 서 있어야 할 법관들도 움직일 수 있고, 종교인들도 움직일 수 있다. 돈이 이런 위력을 갖고 있다 보니, 편법과 불법도 불사한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 종국은 비참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한 삶이 선한 종말을 낳고, 악한 삶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

스필오버(spillover) 효과도 있다. 스필오버 효과란 하나의 현상이 주변에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한 사람이 잘 되면 그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잘 된다. 어떤 학생이 공부를 많이 해서 인품과 지식이 높아지고 소득이 많아지면, 그 학생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이웃, 나아가 사회 전체에도 이익을 주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온 인류가 구원과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멋지게 변화되면, 그 사람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고, 조직이나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축복과 행복을 확대 재생산시켜야 한다. 그런데 아담처럼 주변에 고통과 아픔을 확대 재생산시킬 수도 있다. 유병언도 그랬다. 한 사람 때문에 10만명이 넘는 구원파 성도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그의 돈을 먹고 함께 동조했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미친 부정적인 여파는 실로 엄청나다.

부실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부실 공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다. 부실 인생은 한 가족을 불행으로 내몬다. 부실 신앙으로 마지막 때 눈물을 흘릴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착각’한 채 살아가니까 문제가 없다. 스스로 위안하며 사니 표시도 안 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그때’가 문제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최후 심판의 때인 ‘그날, 그때’가 되기까지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그날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누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날 줄 생각했겠는가? 누가 유병언의 비참한 최후가 오리라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그날 그때가 반드시 다가온다. ‘아직도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 그걸 발견해서 부실 신앙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 그래야 그날, 그때 엄청난 아픔과 슬픔을 피할 수 있다!

[알려드립니다] 위 기사에서 “평소 유병언과 돈으로 연결되어 있던 정치인과 종교인들”, “구원파에서 하나님으로 추앙받던 교주”라고 표현했으나, 유병언 회장의 정관계 유착설은 검찰에서 수사를 한 바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복음침례회 측에 확인한 결과,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성경과 하나님을 믿는 교단으로서 특정 개인을 교주로 섬기거나 하나님으로 추앙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