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7월 20일
본문: 에베소서 6:5~9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주께 하듯 모든 사람에게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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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당시 로마 제국 안에는 수백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자연히 그 사회에서 노예들이 담당하는 부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자유인들에게 있어서 힘들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노예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들도 있었고 주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는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진솔하게 다루어야 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노예제도를 정죄하지도 않지만 너그럽게 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는 주인들과 노예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함께 살 것인지에 관해 말합니다. 바울 당시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예들은 별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들에게 사회가 그들에게서 부인하는 자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남편들과 부모들과 주인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악한 때에 세월을 아껴야 할(엡5:16)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한 일련의 권면 끝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했습니다. 그 권면을 사도 바울은 먼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적용시켜 썼고(엡5:22-33), 다음에는 자녀들과 부모 사이에 적용시켜 말했으며(엡6:1-4),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종과 상전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 사이나 부모자식 간의 바른 관계의 이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종들과 그 상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인식은 그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도처에서 노예제도가 대부분 폐지된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직업관과 노동관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기독교 신앙 속에서의 종들과 상전들과의 바른 관계, 보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신앙인의 관점에서 본 대인관계의 바른 자세를 살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들과 상전 사이의 도리를 말하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본문 5절), "주께 하듯 하라"(본문 7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먼저 본문 5절에서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합니다. 그런데 "행하라." 하면서 "마음으로"라 한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라는 말은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으로"라 한 것은 "목숨으로"라는 뜻입니다. 즉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말입니다. 옛날의 종들은 주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즉 흔히 사람들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자기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경우에는 남을 기쁘게 하는 일을 눈가림으로만 하기 쉬운데 반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는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의 존귀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놓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7절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목숨까지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되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해주시기를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도리라고 여긴 것을 그대로 그 당시 종의 신분으로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상전들에게 행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본문 5-7절을 다시 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 8절에서 제시합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사람을 향해서 한 모든 일에 대한 판단과 그에 따른 상벌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육체의 상전" 즉 이 세상에서의 상전으로부터 오는 상벌도 있을 것입니다. 잘 한 일에 대해 상응하는 칭찬과 상급을 주는 지혜롭고 선량하며 공평한 상전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잘 해도 인정해줄 줄 모르고 칭찬과 상급에는 인색하며 오히려 멸시와 학대와 혹사만을 일삼는 상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정말 잘 한 종과 눈가림만 잘 하는 종을 분별하지 못하고 논공행상을 부적절하게 하는 어리석은 상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상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삶은 고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받는 평가와 상급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대범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가 만사를 가장 공정하게 처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정말 두려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에게 주실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직장에서의 참기 힘든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게 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합니다. 종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자유인 즉 상전들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사람의 도리는 종의 신분을 가진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전 된 자유인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도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밝힙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바울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 하는 것입니다. 종들이 상전에게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상전들도 종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또 다시 본문 5-7절을 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러니까 상전들도 그들의 종들을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눈가림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종들을 대하기를 주님을 대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종들을 거느린 주인이며 상전인 자유인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는 KBS 주말드라마 <정도전>을 통해서 자기 시대를 앞서 가며 백성이 주인이 되고 왕이 아닌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의 통치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보여주는 사고는 그보다 더 혁명적일 뿐 아니라 무려 근 1400년이나 앞서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위협은 상전들이 종들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관리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방법을 버릴 것을 권합니다: "위협을 그치라." 위협을 그치라는 것은 관리방법, 통치방법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새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밑바닥에는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본문 9절 하반절에서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란 종들에게나 상전들에게나 꼭 같이 진정한 상전 되시는 이를 말합니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곧 하늘에 계신 이 즉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종이나 상전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종이었는지 상전이었는지 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신1:17에 보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모를 보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에게서 "귀천을 차별하지 말라"는 뜻이고 재판을 할 때도 "지체 높은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 사람들도 종이든 상전이든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오늘 본문에서 종들에게 행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성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사람들을 상대로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의 책임감과 정직성을 중요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고는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서 누구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든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고용주이거나 감독관이신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용주나 감독관이 선량하고 공정한 사람이건 아니건, 지혜로운 사람이건 아니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주님을 위하여 하듯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일이든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이든 맡은 일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노동관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대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생활관을 세우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누구와도 하나님 앞에서 하듯 하고 주님을 위하여 하듯 할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존경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