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세기 10:22)

앗수르 후손들의 정착지

성경에서 앗수르(Asshur)는 셈의 둘째 아들로 소개되고 있다(창 10:22; 대상 1:7). 영어의 앗시리아(Assyria)는 바로 히브리어 앗수르의 영역(英譯)이다. 앗수르도 엘람처럼 그 후손들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지 않고 있다. 엘람과 마찬가지로 앗수르도 일찌감치 셈 공동체와 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앗수르의 후손들은 앗수르 제국을 통해 자신들과 자신들이 살던 지역이 앗수르의 땅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성경은 함족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세상의 처음 영걸(英傑)이라 그가 시날 땅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하여 앗수르 방면으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대 앗수르 땅은 단순한 앗수르 후손들이 독점한 땅이 아니었다. 이 지역에는 함족 니므롯과 그 추종자들이 몰려 들어와 일찌감치 함족의 바벨론 문화(니므롯 계열)와 셈족 문화(앗수르 계열)가 혼합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때로 고대 앗수르 제국의 초대 황제가 니므롯이었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여기에 이 지역에는 주전 3천여 년 전 비(非) 셈족 계열의 ‘수바르 족’(Subarian)과 셈족 계열로 여겨지는 ‘수메르 족’(Sumerian)도 있었다. 바벨론이 초기 주로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반면 앗수르는 티그리스 강 상류인 바벨론의 북서부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훗날 이 두 제국은 결국 혼합 문화를 이루었고, 마침내 오늘날 이라크라는 국가로 남게 되었다.

앗수르 제국의 흥망

남방의 바벨론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비옥한 평지를 차지한 반면, 앗수르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중상류를 거느리면서 남쪽으로는 바벨론을 맞대고 서쪽으로 시리아 사막과 북쪽과 동쪽으로 메데와 셈족 엘람의 땅인 페르시아를 접하고 있었다. 이 같은 지정학적 위치는 정치적 힘을 소유하게 되면 큰 폭발력을 가지게 된다. 무역과 정보가 교류하는 사통팔달의 지정학적 장소에 위치한 앗수르는, 일찍부터 앗술과 갈라(Calah)와 니느웨 지역(주전 2350년경 셈족 계열의 사르곤이 건설)을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 축을 이루었다. 앗수르 초기 왕국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의 고대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 연원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왕들은 유목민들의 족장이었다. 하지만 제31대 왕 일루-슈마(Ilu-shuma, 주전 1830년경) 때에 이미 아나톨리아(터키 소아시아) 지방에 무역 식민지를 세워 양철과 직물을 수출했고 은(銀)을 수입했다. 샴시-아다드(Shamshi-Adad, 주전 1813-1781)는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테르카(Terqa) 출신으로 마리(Mari)를 정복하고 앗술에 성전을 건축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때는 바벨론의 함무라비와 동시대였다. 함무라비 시대(주전 1800-1760) 잠시 위축되었던 앗수르는 고(古) 앗수르 시대의 막을 내리고(주전 약 1650년) 다시 제국의 기틀을 닦기 시작한다. 1887년 이집트 텔 엘 아마르나(Tell el-Amarna)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는 애굽 뿐 아니라 미타니, 헷족, 바벨론과 앗수르를 포함하는 당시 열강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서신은 이집트왕 아크나텐(Akknaten, 주전 1360년 경, 아멘호텝 4세)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팔레스틴 왕의 편지였다. 함무라비 이후 수백 년 동안 일부 위축된 시기는 있었더라도, 앗수르 왕국은 여전히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앗수르 왕은 신(新) 앗수르의 앗술 우발릿 1세(Ahur-Uballit 1, 주전 약 1364-1328)였다. 앗술 우발릿 1세는 헷족속과 연합하여 미타니 왕국을 멸하고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배권을 확립한다. 이때부터 고대 앗수르 제국의 전성 시대가 도래한다. 앗수르는 바벨론 왕국보다 더 강해졌으며 그 힘은 아라비아 해에서 그리스 에게해까지 이르렀고, 남북으로는 아르메니아에서 애굽까지의 넓은 판도를 차지하였다. 주전 14세기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 약 700여 년간 앗수르 제국은 고대 근동 지방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이후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갈대아인들에게 함락되어 제국의 해가 진 것은 주전 612년이었다. 그리고 하란(주전 610년)과 카르케미시(주전 605년)가 함락되면서 앗수르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앗수르 수도 니느웨는 오랫 동안 그 위치가 불분명하였다. 하지만 근래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인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자이퉁 부대가 주둔 중인 모술 인근에서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성경과 앗수르

성경은 먼저 아브라함의 자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앗수르 지역까지 나아가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한다(창 25:18). 디글랏-빌레셀 1세(Tiglath-Pileser 1, 주전 1115-1077) 시대 지중해의 시돈과 비브로스, 아르밧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조공을 받던 앗수르는 아람의 강한 저항과 내부 문제로 잠시 주춤한다. 주전 1100년과 900년 사이에 일어난 앗수르, 바벨론, 엘람의 동시 권력 쇠퇴에 따른 중동 땅 권력의 힘의 균형 현상은 절묘하게도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민족의 융성기를 가져왔다.

이후 앗수르 제국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 시대였다. 아람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자, 요아스는 선왕들과 자기가 하나님께 바쳤던 예물과 금을 몽땅 털어 하사엘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성경은 하사엘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2:17-18). 하지만 요아스가 예물로 구원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요아스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함부로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해 아람왕에게 바친 것은 큰 죄악이었다. 역사는 앗수르의 아나드니나리 3세(주전 810-782)가 주전 804년 다메섹의 하사엘을 공격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구원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아나드니나리를 섭정한 삼무라마트(Sammuramat)는, 훗날 그리스 전설에 아름답고 현명한 앗수르 여왕으로 알려진 세미라미스(Semiramis)였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은 34톤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 권력을 견고히 하려고 했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왕하 15:19). 불(Pul)이라고도 불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아나드니나리 3세의 아들이었다. 앗수르의 통치자 불은 우상 신들을 섬기던 므낫세 동쪽 반지파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할리, 하복, 하라 그리고 고산 강가에 분산 수용하였다. 이는 이 세 지파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영원히 멀어지고 결별하는, 슬픈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므나헴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앗수르를 끌어들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앗수르의 불왕은 북아람을 점령하여 한 도(道)로 편입하였으며, 유대인들도 독립국가가 아닌, 앗수르어로 “울루부”(Ullubu)라고 불린 지역에 기거하고 있는 포로로 취급할 뿐이다. 그리고 불의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는, 호세아왕이 애굽을 의지하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일을 핑계(왕하 17:4)로 사마리아를 포위·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켜 버렸다. 사마리아 성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과 메디아로 끌려갔다(왕하 17:6). 이때 함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만에셀 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앗수르의 마지막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앗수르의 두 왕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풍전등화와 같은 남유다 왕국은 이 당시 히스기야의 치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열강 제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곤의 뒤를 이은 산헤립(주전 705-681)도 선왕들처럼 전쟁을 즐겼다. 산헤립은 앗술을 거쳐 니느웨를 앗수르의 수도로 삼은 왕이기도 했다. 그는 바벨론, 갈대아, 엘람인들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므로닥 발라단이 앉았던 바벨론 왕의 자리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므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왕하 20:2-19). 산헤립은 주전 701년 아람으로 진격하여 시돈을 공략하고 아스글론을 거쳐 라기스를 정복했다(왕하 18:13,14). 그리고 남은 예루살렘을 장기간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왕하 18- 19장; 대하 32장; 사 36-37장). 히스기야는 새장의 새처럼 갇혀버렸으며, 앗수르에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왕하 18:14-16). 약소국의 슬픔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므낫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한때 앗수르의 영역 안에 있던 바벨론에 잡혀가기까지 했다(대하 33:11). 에살핫돈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앗수르바니팔(주전 669-633)이었다. 애굽으로 진격하여 테베를 약탈하고, 애굽 왕 바로 느고를 죽인 앗수르 왕이 바로 앗수르바니팔이었다.

앗수르 족의 종교

앗수르의 지정학적 위치는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의 성격을 띨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잡신 문화가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이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다. 수메르 문명에서 기인한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원론적이었다. 판테온(Pantheon, 온갖 신들을 모신 만신전)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메르의 판테온에는 3천 내지 4천의 신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수메르의 바람의 신 ‘엔릴’(Enlil)과 바벨론의 말둑(Marduk, 렘 50:2)과 앗수르의 앗술은 민족 신인 동시에 최고의 신들이었다. 엔릴은 수메르의 하늘의 신 ‘아누’와 땅의 신 ‘키’ 사이에 태어난 ‘니풀의 신’이었고, 벨(Bel, 사 46:1; 렘 50:2; 51:44)은 말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한 수메르인들은 ‘앗술’에 ‘엔릴’을 위한 지구랏을 건설할 만큼, 이 지역은 고대부터 종교적·문화적 소통이 활발하였다. 니느웨의 앗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견된, 주전 7세기 중엽 쓰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가 성경 창세기 기사나 대홍수 이야기와 유사하면서도 성경과는 다른 다신론적 창조 신화인 것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유명한 월신(月神) ‘신’(sin)이나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Ishitar), 지혜와 문필의 신 ‘나부’(Nabu) 등도 모두 앗수르 땅의 신들이었다. 유일신을 섬기던 이스라엘과 우상 잡신을 섬기던 앗수르는, 같은 셈족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있어 이렇게 판이하게 갈렸다.

앗수르 족의 미래

오늘날 셈의 아들로서의 앗수르와 그 후손들은 앗수르 제국과 그 백성들의 이름 안에만 남아 있다(민 24: 22, 24; 호 14:3). 그들이 숭배하던 신(神)의 이름조차 ‘앗술’이었다. 앗수르 제국이 융성할 때, 앗수르인들의 지식과 예술과 문명의 불꽃은 크게 타올랐다. 반면에 앗수르의 황제는 교만하고 잔인하였다(사 10:11-12). 하나님은 이런 앗수르 왕의 교만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자랑과 위세란 허망할 뿐이다(사 10: 16-19). 이제 과거의 제국들은 사라지고 오늘날 앗수르와 바벨론의 옛 땅인 이곳은 지금 주로 이라크의 땅이 되었다. 이라크는 독재자 후세인 통치 시절 그나마 절묘하게 종교적 균형이 이루어져 왔었다. 한때 후세인 시절 부통령이 시리아 정교회 기독교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후세인 시절 모술의 시리아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은 전체 모술 인구의 25%에 달하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후세인의 철권 정치는 종언(終焉)을 고하게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지역을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과 위협이 점증하는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거 앗수르 제국 시절 신들의 상과 조각이 넘쳐나던 이 지역에, 과연 언제 참 하나님의 진리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주전 759년 경 갈릴리 출신 선지자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 성에 가서 성의 멸망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과 왕은 함께 회개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집단적 회심의 보기였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니느웨 성 백성들의 회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아들 앗수르에틸일라니의 치세 때에 결국 멸망 당하고 말았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대로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니느웨(앗수르)를 향한 요나의 외침과 니느웨 백성들의 대응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복음은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나처럼 복음에 반응하고 행동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신다. 21세기의 요나여! 21세기의 니느웨여! 함께 일어나라! 지금은 마치 이슬람 국가처럼 변해버린 이곳에 복음의 빛이 다시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