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세계한인선교전략회의가 경기도 용인 양지 Acts29비전빌리지에서 한 주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큰 도로에서 외진 길로 조금 들어서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건물이 나타난다. Acts29비전빌리지다. 이러한 골짜기에 이렇게 규모가 큰 건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감탄을 자아낸다. 정상 수준의 선교센터, 국제대회를 열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시설이라고 여겨진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후배 동료들과 여러 지역에서 사역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반갑고 즐거웠다.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고민하고 함께하는 일이, 한국 선교의 발전을 위하여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을 한다.

“변혁시키는 선교한국”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대회 기간, 영성 회복과 영적 권위 회복, 도덕적 권위 회복을 위하여 모두가 통탄하면서 기도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상황과 위기는 우리 모두의 책임과 잘못임을 고백하고, 깨어있지 못함과 진실하지 못함, 하나되지 못함을 회개하였다.

이번 주제는 “자신학과 자선교화”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생소한 단어와 해설들에 선뜻 이렇다 할 만한 이해를 내놓지는 못하였다. 자신학은 쉽게 말해서 우리의 신학을 만들어내자는 것인데, 지금까지 서구의 신학적인 배경과 학습에 너무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신학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필자의 생각은, 지금까지 신학의 형태는 구원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본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신학의 발전은 창조신학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각 지역에 따라서는 신학의 적용점이 다르다. 남미의 경우에는 민중의 해방을 선포하는 해방신학·민중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유럽에서는 양차대전을 경험하면서 사신신학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영성신학·성령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도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구원신학에서 축복신학 기복주의로 흘러서, 오늘에는 물질만능신학으로 이동하고 있다. 거기에 잡다한 다원주의·혼합종교주의로 나아가며, 신복음주의운동, 새로운 영성운동, 백투예루살렘운동, 빈야드운동, 신사도운동이 각 지역에서 줏대 없는 자신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서구의 신학이라고 하는, 지금까지 우리가 학습하고 익혀왔던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이나 역사신학 등 이러한 모든 것을 배제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어떤 자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찬송가도 민요를 적용한 것이 몇 곡 수록되었다. 우리의 신학을 만들어 내는 노력도 절실하지만, 무엇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성경에 기초한 신학사상을 배제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질문해 본다.

자선교학을 주장하지만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얼핏 느끼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자랑하고 있는, 북 치고 장구 치는 예배의 형태나 주여삼창기도나 새벽기도 이러한 것이 우리의 실천신학적 자신학화되어 한국교회에서 익숙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선교사들은 현지교회에 적용하라는 이야기인가? 이것이 자선교화라는 말인가 의구심이 일어난다.

왜, 우리의 것을 그들에게 적용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서구신학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 우리의 교회 문화를 선교 현장에 이양하려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현장마다 그들이 문화와 습관화된 종교 신앙형태가 있다. 그것을 더욱 보존하고 발전시켜, 그들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방법과 원리를 제시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러시아 교회 문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여성도들이 아직도 머리에 두건을 쓰고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들의 예배 형태이다. 이것을 한국 선교사들은 대략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러시아 교회는 기도를 마치면서 삼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배워오고 익숙한 우리에게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 한국의 신학자들에게 질문을 해 보지만, 현지 교회가 무식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선교사들은 삼위로 기도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교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2백년 이상을 그렇게 기도해왔다. 자신학과 자선교학이라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태도나 예배 형태 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지, 한국적인 것을 이양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틀렸다고 할 만한 이론은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 바울이 삼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보게 되니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식사 시간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기도하는 중간중간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매우 합당한 것임을 보게 된다. 자신학과 자선교학이란 이러한 것을 더욱 존중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말이다!

행여 우리의 종교 형태를 피선교지에 적용시키려 한다면 그것을 커다란 실수인 것이다. 문화침략자라고 오해받을 수 있다. 서구신학과 사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자신학화라면, 우리는 피선교지에 우리의 신학과 예배 문화를 이입하여서는 안 된다. 그들도 한국선교사들에게 배운 예배 형태를 벗어나, 그들의 자신학과 자선교학을 주장할 때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서구신학도 한국형도 아닌, 성경의 문화와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유하여야 한다. 자신학화는 오히려 오류를 낳을 수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자신학화 작업을 통하여 이콘을 만들어내었다. 무지한 백성들에게 교육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어 오늘날 잘못된 신학화 작업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자신학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기존의 신학에 깊이를 더하여 발전시켜 나가 진리의 오묘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학화하는 일이 아닐까?

자신학은 성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서구신학에 대한 거부로, 혹은 우리의 독특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중단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이슈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헛된 영웅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더 실제적인 것들을 가지고 논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와 선교에 매우 절실하다고 본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Lee709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