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오늘은 호주에서 일어난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 두 가지를 나누어 보려 한다.

어느 늦은 밤, 호주에 살고 있는 노부부 가정에 20대의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찾아와서 노크를 했다. 한밤중에 왜? “전화를 좀 쓸 수 있어요?”

180cm를 넘는 키, 100kg이 넘어 보이는 체중. 흔치 않는 거구였다. 첫눈에 봐도 인상이 좋지 않아 보였다.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다. 사내가 30cm 정도의 큰 사냥용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돈을 요구했다. 깜짝 놀란 남편이 대답했다. “돈 없어요.”

화가 난 듯, 사내는 칼을 들고 팔을 뻗치면서 위협적으로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순간 할아버지는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자를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사내의 머리를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슈퍼마켓의 배송 책임자 출신이다. 그런데 지금은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고혈압으로 병든 몸이다. 그러나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내리친 의자에 맞은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할머니는 람보와 같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남편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그러나 사내는 할머니를 멀찌감치 내던졌다. 아내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본 할아버지가 틈을 타서 다시 의자를 들어올려 사내의 머리를 가격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이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고 눈에 불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의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사내는 놀라서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사내는 포기하지 않고 3번째로 할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는 할아버지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달아나듯 발길을 돌렸다. 사내가 밖으로 나가려 할 때, 할아버지는 다시 그 사내를 향해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의자는 철망 문을 뚫고 나갔다. 그리고 사내는 황급히 도망쳤다. 마치 놀란 토끼처럼.

아내를 사랑한 할아버지는 용감했다. 남편을 사랑한 할머니는 용감했다. 이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배우자를 아프게 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있는 할아버지·할머니 부부가 부럽기만 하다.

호주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노부부 사랑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첫눈에 반해 그 자리에서 바로 결혼 약속을 하고 60년을 해로해 온 노부부. 그런데 나란히 암에 걸려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부부. 병원치료나 약물도 거부하고 있는 부부.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7년 당시 반나치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돼 3년간 강제수용소 생활을 한 남성이 있었다. 어느 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카페에서 한 여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다. 청년은 테이블에서 바로 일어나서 그 여성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저랑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게 청혼이야? 느닷없이 한 남성의 청혼을 받은 여성은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럴게요.”

여성은 청년의 청혼을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렇게 쉽게 결혼을 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결혼을 해도 잘 살 수 있을까? 어리석은 철부지는 아닐까? 아님, 이게 바로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건가?

어쨌든 꽤 이례적인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5남매의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물론 남편 혼자의 수입으로 5남매를 키우느라 힘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다.

1967년 이들 부부는 호주로 이민 왔다. 암스테르담에서도, 호주에서도, 남편은 포드사에 근무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무조건적 헌신을 했다. 사실 상호 의존성이 심각할 정도였다. 수 년간 서로를 돕다 이제는 병까지 함께 앓는 병상의 동지가 되었다. 할머니는 간암 말기 환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림프종과 빈혈에 걸렸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할아버지가 수혈과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왜? 할머니와 함께 가기 위해서.

노부부는 서로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양로원에 가는 것도 거부했다. 입원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집에서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가기를 원하고 있다.

아름다운 노부부의 동행이다. 부부가 행복하게 동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많다. 많은 부부들이 그 덫에 맥없이 쓰러진다. 예수님은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기에 자기 몸을 내어주셨다. 아낌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런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 주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 많은 남편들이 이런저런 조건들을 내건다. 그 조건에 맞으면 사랑하려 든다. 물론 조건에 맞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게다. 그래서 이혼하자고 한다. 다른 여자를 찾아다닌다.

예수님은 아내에게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주문하셨다. 그런데 남편에게 복종하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요즘은 아내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아내들의 능력이 얼마나 좋아졌는가? 그러니 남편을 우습게 여기는 아내들이 부지기수다. 경제력이 힘의 우위권을 점유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도 많다. 그러니 경제력이 약한 남성들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영향력이 미미해진다.

‘두고 보자’고 때만 기다리는 아내들도 많다. 지금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주지만, 때가 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남편이 힘과 능력이 없어질 그때. 아내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때, 아이들이 결혼하고 분가할 그때. ‘그때가 되면 널 헌신짝처럼 가차 없이 내던지리라!’ 그래서 황혼이혼이 점점 늘어간다.

그렇다 보니 부부가 행복한 동행이 아닌 불행한 동행으로 치닫고 있다. 멈추지 못할 정도로. 혹자는 표현은 못해도 속에서 끙끙 속앓이 하는 그 무엇이 웅크리고 있다. 이제 한 번 점검해 보자. 우리 부부가 걸어가는 동행 길에는 이상이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