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목사(듣는마음상담소 대표).

결혼의 설계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은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돕는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일방적으로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의 부족한 점을 돕고, 아내는 남편의 모자란 점을 돕는 것이다. 돕는 것은 상대방을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결혼 원리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서로 ‘돕는 배필’이 아니라 ‘바라는 배필’을 원한다. 그래서 신혼기가 지나 이러한 기대가 무너지면 힘겨루기를 한다. 서로 비판, 분노, 후퇴, 수치 등 여러 가지 부정적 수단으로 자신의 힘을 행사하려 한다. 심지어 상대방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골라 괴롭히는 일도 있다. 아무리 기대하고 싸워보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또는 변할 수 없는 배우자에 대해서 절망을 하게 된다. 상당수의 결혼관계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이 단계에서 멈춘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은 전 영역이 죄로 물들어 있다. 인간의 의식 뿐만이 아니라 무의식에까지도 죄가 침투해 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어서,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단순한 처방으로 부부관계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인간의 죄악은 나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부부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배우자가 자신의 모든 욕구를 채워야 하고 또 채워줄 수 있다고 하는 믿는다. 부부관계에서 심리적 필요도 중요하지만, 결혼 자체가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인간은 결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돕는 배필’이 아닌 ‘바라는 배필’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

‘바라는 배필’과 ‘돕는 배필’은 각각의 상황에서 아주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바라는 배필을 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불만의 요인이 된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바로 존재의 이유가 된다. 바라는 배필을 구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받을 것만을 주로 생각하지만, 돕는 배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배우자를 도울까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보게 되면, 바라는 배필을 구하는 자는 자신의 원하는 욕구를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분노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돕는 배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위로하며 축복한다. 바라는 배필을 구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문제를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자신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분노와 피해의식이 커져 실수나 연약함을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실수나 실패가 오히려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느끼고 인내하며 함께 극복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데려오셨을 때, 아담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지났을까? 사악한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할 때까지도 괜찮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알고 그들을 대면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그들은 서로 ‘돕는 배필’이 아닌 ‘바라는 배필’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결혼 생활의 불행은 배우자를 ‘돕는 배필’이 아닌 ‘바라는 배필’로 보는데 있다. 돕는 배필이란 남자가 여자를 돕고 여자가 남자를 도와서 서로 완성된 인격체로 세우는 데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리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는 배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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