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7월 13일
본문: 에베소서 5:15~21
설교: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제목: 악한 때에 세월을 아끼라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4:1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반부인 1-3장에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과, 그 교회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도리를 설명했다면, 후반부인 4-6장에서는 이에 따른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후반부에서 주어지는 여러 권면들을 요약하며 이 후반부의 정점에 서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본문 15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정말로 주의를 기울여서 어리석은 자같이 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본문 16절에서 보듯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때나 시간이나 세월 자체가 악하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의 세상이 악하고 사람들이 악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아갈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적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악한 때를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실감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대통령이 총리를 비롯한 몇몇 장관급 인사들을 경질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관련부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도덕적 측면에서 엄격한 국회의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인사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 인사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특히 총리후보자를 지명하면서는 최우선적으로 중시한 것이 청문회 통과 가능성 여부였습니다. 총리로 지명을 받은 분은 모처럼 도덕적으로 걸릴 것이 없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엉뚱하게도 그의 신앙적 발언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시달리던 끝에 자진사퇴 형식으로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친일파니 매국노니 하는 욕을 먹어야 했습니까? 주로 과거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일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한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그 발언이 어떤 장소 어떤 모임에서 한 것인지는 온 국민이 다 압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역사가들의 학회에서 한 강연이 아니었습니다. 한 기독교신앙인으로서 신앙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발언에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의 하나가 섭리신앙입니다. 섭리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단지 창조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온 세계가 당신의 창조목적에 이르도록 당신의 주권과 지혜와 권능과 의와 사랑으로 계속해서 다스리시고 인도해 가심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인도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허락하심으로써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는 계속 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방해하심으로써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닐 때 가려는 길을 자꾸 막으셔서 결국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지만 방해하지도 않으시고 내버려두시되 그 일의 진행방향을 돌려놓으심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다른 일을 이루시는 데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질시하여 그를 먼 이집트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넘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방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창39:1-4). 그런데 그 집 여주인이 요셉을 좋아하여 날마다 그를 유혹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거절하자 그 여주인은 거꾸로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여주인의 행실은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니지만 방해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바람에 요셉은 또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옥살이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요셉은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잘 해석하여 신임을 얻은 요셉은 서른 살의 나이에 이집트 온 땅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41:41).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은 칠 년 간의 풍년 동안 뒤에 올 칠 년 간의 흉년에 잘 대비하여 모든 이집트 백성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 백성까지도 다 기근에서 살려내는 큰일을 한 것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 모든 가솔까지도 요셉 덕에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우리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간 것이나 바로의 친위대장의 부인에 의해 무고를 당해 옥살이를 하게 된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일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바로의 친위대장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고 뜻대로 안 되자 그를 무고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며 그 일이 되어가는 방향을 바꾸셔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더 큰 일을 이루시는 데 이용하신다는 뜻으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그의 형들은 큰 흉년에 양식을 구하려 이집트로 내려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바로 옛날 자기들이 팔아넘긴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얼마나 큰 불안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까? 그런데 그 형들에게 요셉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일을 내버려두셨지만 그로 인한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용하셔서 인류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에서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행위에 마땅한 정죄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 섭리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베트남 호지민시에서 아웃도어를 생산해서 미국과 유럽 등지로 수출하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난번에 베트남에서 대중국 반감이 폭발해서 폭동을 일으킨 근로자들이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공장들을 약탈하며 중국인 몇 명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불똥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은 집사님 회사까지 튀었습니다. 회사가 완전히 약탈을 당했습니다. 생산된 제품뿐 아니라 원자재며 재봉틀이며 컴퓨터며 휴대전화까지 하나도 남은 것 없이 몽땅 털렸습니다. 폭도들에게 붙잡혔다면 생명까지도 잃을 뻔한 위기에서 그 집사님은 기적적으로 살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탈출과정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부인 권사님이 귀국해서 주일예배에 나오셨습니다. 예배 후 인사하러 다가온 권사님에게 걱정스럽게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그 권사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말이 "다 하나님의 뜻이예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베트남인들이 그 집사님의 공장을 다 약탈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런 악한 일을 당했지만 생명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사건을 계기로 더욱 더 겸손하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더욱 더 신앙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예요."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신앙적인 발언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줄 모른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총리후보자였던 이의 "하나님의 뜻" 발언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그런 신앙을 고백했다고 총리가 될 수 없다 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에서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공직에 오를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엉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우리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악하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총리후보자를 비난하며 총리지명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시위도 벌였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불교 신자가 그런 경우에 "다 부처님의 뜻입니다." 해도 그 이유로 정치적 반대를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일 것입니다.

악한 때를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더더욱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적당히 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본문 18절에서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악한 때에 세월을 아껴야 할 터인데 술 취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 하면서 기껏 술 취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는 것은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음주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정신을 놓고 책임을 망각하며 그저 먹고 마시며 노는 일로 할 일을 소홀히 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의 자세를 경고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이는 방탕한 것이니" 했는데 바로 그런 뜻에서 한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 "방탕함"이란 다름 아니라 "세월을 아끼지 않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악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자세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살 것인가 결단할 것을 사도 바울은 촉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해줍니다. 본문 19-21절을 다시 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먼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 합니다. 여기서 "시"란 시편을 가리킵니다. 시편에는 역경 속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한 신앙인들의 고백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악한 때에 이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성도들이 서로 나누며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좋은 것입니다. "서로 화답"하는 것은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을 찬송하는 것도 신앙의 용기를 북돋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합니다. 20절에서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의 인도하시는 방법을 이해한다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보기에 불의하고 악한 일들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존귀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때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사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끝으로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때가 악할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싸우지 말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 그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한 말의 뜻입니다. 악한 세상과 마귀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찢어놓고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으려고 온갖 궤계를 동원할 것입니다. 이에 놀아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바른 믿음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진정 한 몸 이루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