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베네딕트 선교사.

우리는 예수님 믿으면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하고 또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변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도 그렇게 믿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나 성질이 바뀌어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삶을 제대로 살면 말이나 행동같은 외적인 것 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격, 내면의 성품까지도 변합니다. 성품도 바뀌고 심지어 외모도 바뀝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길 원하십니다. 옛 사람의 상태가 아닌 새 사람의 상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구원도 은혜로 받았지만, 성화도 즉 성령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조급하게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지만 그 변화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내일 내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숙을 위해서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다림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요즘 가축의 빠른 성장을 위해 성장 촉진제라고 하는 것을 소와 돼지 같은 동물들에게 주사합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그렇고 그 동물의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도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성장 촉진제와 같은 것을 사용하셔서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에 있어서 제일 큰 방해요소는 바로 조급함입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속성 과정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조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즉시 아들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100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광야에서 오랜 시간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회심 후 곧바로 다른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고 아라비아 광야로 보내셔서 3년을 칩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성을 가진 인간은 언제나 조급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늘 재촉합니다. 영적으로도 빠른 시간 안에 자기의 노력으로 성장해 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문제만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노력도 아니고 공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뒤꿈치를 잡는 야곱을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이스라엘로 바꾸셨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야곱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단숨에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급하게 변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무려 20년이나 훈련시키셨습니다. 그에게는 성장과 성숙을 위해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야 합니다. 변화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많은 집회들을 따라 다니며 성령을 체험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절대로 어느 선교단체의 훈련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위해서 20년이란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장하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영적인 변화를 복으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조급해 하기보다는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예전에 대학 병원에서 치과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께 특진을 받았는데 교수님은 자신의 제자인 수련의에게 신경치료를 시키셨습니다. 치료가 다 끝났다고 판단된 수련의는 치료를 마무리했습니다. 얼마 뒤에 교수님이 오셔서 보시더니 다시 치료하라고 하셨습니다. 수련의가 “교수님! 치료를 다 했는데 왜 다시 합니까?”라고 물으니 교수님께서는 “치료를 한 군데 안 했잖아? 신경 치료 한 곳을 안 했는데 그것 놔두고 마무리해 버리면 어떻게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련의가 놀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교수님 눈에 그게 어떻게 보입니까? 제 눈에는 안 보였는데요.” 그랬더니 교수님 하시는 말씀이 “지금 보이면 안 되지, 치과 의사 20년 해 봐. 그 때 보일 거야.” 누워 있는 저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습니다. “내가 실험 대상도 아니고 왜 이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똑같은 의사인데도 보는 사람이 있고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 생활 20년을 하면 X레이상에서도 안 나타나는 게 보이는, 그런 연륜을 가지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른이 되면 어른만이 보일 수 있는 성숙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말하면서 행동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래서 교회에 다닌 지 40년이 넘었는데, 어떠한 성장도 성숙도 없다면 그것은 당연히 큰 문제입니다.

무작정 기다려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시련들과 아픔을 통해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처럼, 신앙도 시련과 아픔이라는 시간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무작정 기다리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을 우리의 인생에 허락하셔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다루십니다. 성경에 보면 거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의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유명한 신학교 교실에 가만히 앉아서 정해진 시간에 탁월한 교수님들에게서 듣는 수업 때문이 아닙니다. 지식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을 광야로 만드셔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쉽게 말하면 산전수전 다 겪게하시는 삶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고 성숙하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기근을 통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실수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보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는 어려움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누명도 강간미수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허락하신 고난을 통해 요셉의 의를 죽이시고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시간이 13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국무총리로 쓰시기 위해서 학교에서 훈련시키신 게 아니라 종살이와 감옥살이라는 광야를 통해서 훈련시키고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모세를 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왕자로 왕궁에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살인자로 전락한 모세를 광야로 도망하게 하셔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을 하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힘이 다 빠지는 데 40년이 걸렸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복 주실 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육신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시들게 하시고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삶에 고난과 시련이 생겼을 때 필요한 것은 어떠한 은사 집회나 영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교만과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적인 생각과 습관들에 길들면 영적인 삶을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성장과 성숙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길들어서 성장이 멈추어 버린 사람들에게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세상적인 생각과 습관들을 버리며 회개할 수 있는 복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간섭하시며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셔서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여 살아가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약함과 죄성을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약하고 무능해서 쓰러지고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고 우리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의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깊게 숨어 뿌리 내리고 있는 육신과 세상을 신뢰하고 있는 완고한 마음을 깨트리시고, 또한 우리의 힘을 전부 빼길 원하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즉 풍성한 복된 땅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광야로 이끄셔서, 그곳에서 우리의 영적인 빈곤과 헐벗음 그리고 이기적인 교만과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사악한 죄성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광야를 통해 내 안에 선한 것도 하나 없고 자랑할 것도 하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이 세상에 내가 자랑하고 붙잡고 살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길 원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고 이것이 성숙이고 성장이며 이것을 깨닫고 살 때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 41-45까지의 말씀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다루시는 영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고 있던 끈들을 끊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고, 우리가 믿고 있는 끈들을 끊으셔서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십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믿고 붙들고 있던 끈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 리브가였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있어서 그가 믿고 의지하는 끈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아들아 너는 내 말을 들으라.” 이 말을 야곱에게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늘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듣고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어머니의 말씀이 절대 우선이었습니다.

창세기 27장 8절에 보면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라고 리브가가 말합니다. 또 13절 말씀에 보면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리브가는 자기 말을 들으라고 말하고 야곱은 그대로 합니다. 창세기 27장 43절에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라고 말하면서 라반의 집으로 야곱을 도망시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 리브가를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붙들고 있었던 그 끈,  야곱이 믿고 있었던 그 끈 어머니 리브가를 떠나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44절에 보면 리브가가 야곱에게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고 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며칠만 형 에서를 피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 기간이 몇 년인 줄 아십니까? 20년입니다. 어머니를 붙들고 있었던 그 끈을 끊고 하나님께 훈련받는 데 2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무척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끈이 끊어져야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우리가 의지하는 끈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가 우리의 믿고 자랑하는 끈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끈을 다 끊으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 즉 외양관에 송아지가 없어도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으면 그 때부터 광야입니다. 돈이 없고 명예와 인기가 바닥을 치면 그때부터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필요한 일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며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며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도록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영적인 진리는 나를 도울 사람이 없어도 견고한 성과 군대가 없어도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7장에 보면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를 당한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당하고 항복을 종용받던 히스기야 왕에게는 내세울 만한 군대도, 도움을 청할 만한 이웃 나라도 없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도움을 청할 만한 누군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사야 37장 36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교만과 불신이 깨어져서 산산조각나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기까지 그 일하심을 절대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과 이기심을 잔잔한 물결에서 깨닫지 못하면 강풍과 파도를 주셔서, 그 교만을 결국에는 꺾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밥줄도 끊으시고 돈줄도 끊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붙잡고 사는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광야는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삶의 힘든 일들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이게 훈련이구나,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엎드리게 만드십니다. 지금 나에게 돈이 없기 때문에 인생이 절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인맥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돈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문제로 인해 사방이 둘러싸임을 당할 때 하나님 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문제가 생기고 고난이 생겼을 때 문제 해결을 받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고난과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나의 불신과 죄성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나의 내면에 생기는 변화와 성숙, 즉 믿음과 겸손이 진정한 복입니다.

시편 125편 1절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기록돼 있는 것처럼, 이 수준까지 우리를 끌어올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본지는 현재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원베네딕트 선교사(유스미션 대표)의 글을 [원베네딕트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비정기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