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FIFA랭킹 3위. 월드컵 최다 우승국. 삼바축구를 자랑하던 브라질. 더구나 월드컵 개최국. 그런데 그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겼다. 너무나 비참할 정도로.

2014년 7월 9일. 축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 날이 되고 말았다. 브라질과 독일의 경기에서 브라질이 7-1이라는 대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세계 2위인 독일에게 진 게 뭐가 그리 문제라고? 경기를 하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패배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0-5로 전반전이 마무리되었다. 브라질 팬들은 이미 패닉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두들겨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얻어터졌기 때문에. 선수들은 이미 더 이상 뛸 사기마저 다 상실했다. 빨리 끝나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데 스코어는 7실점하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점이다.

마치 64년 전 벌어진 월드컵 광경을 재연하는 것 같았다. 1950년 7월 17일 열린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의 비극도 비슷했다. 당시 연승가도를 달리던 브라질은 엄청난 파괴력을 과시하며 결승까지 갔다.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경기 종료 10분 전, 역전 결승골을 얻어맞고 1대 2로 패했다. 준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때 마라카낭 경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무려 17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모인 도가니였다. 당시의 충격과 분노를 참지 못해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2명은 심장마비로. 2명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급기야 브라질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전국에 조기가 걸렸다.

64년이 지난 브라질에서 열린 이번 월드컵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월드컵이 개최되기 전부터 브라질 정국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경제적인 진통을 앓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월드컵 준비를 위해 공공복지 예산을 써 버렸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막전부터 된통 몸살을 앓은 셈이다. 과연 월드컵을 치를 수 있을까 의구심을 자아냈다.

만약 브라질이 우승컵을 거머쥐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월드컵 우승이라는 기쁨이 분노를 잠재울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브라질이 독일에 참패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월드컵 열기에 주춤했던 반정부 시위가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기 후에 울분을 감출 수 없었던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기를 불태웠다. 버스에 방화를 했다. 주민들이 상가를 습격해 약탈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하다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무장한 괴한들은 소란한 틈을 노려 가방과 귀중품을 빼앗는 강도 짓거리까지 벌였다. 벨루오리존치시에서는 축구팬들이 충돌해 최소 12명이 부상하고 8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에도 1000명 이상이 모이는 항의집회가 열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16강을 넘어 8강으로 가기를 갈망했던 홍명보호는 1무 2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세월호 참사를 위시한 이러저런 사건들로 인해 끓어오르는 국민적 정서를 달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축구팬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패배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게 빗발쳤다. 관심은 홍명보 감독의 경질에 대한 문제였다. 한때는 아시안컵까지 유임하는 듯했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이런저런 비난 여론에 몰려 결국 사퇴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 신문 기사를 기억하는가? “용서를 구하지 마세요. 우린 이미 당신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스페인 신문 1면에 나온 기사다. 우리가 알듯,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벌어진 또 다른 이변이 있었다. FIFA 랭킹 1위인 무적함대 스페인이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것이다. 전 세계적인 충격이니 스페인 국민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스페인 선수들은 죄인 마냥 눈물을 흘리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스페인 언론은 달랐다. 역사의 숙적인 네덜란드에 1대 5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언론과 국민들은 그 젊은이들을 무조건 끌어안았다. 차원이 달랐다.

살다 보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때가 많다. 속이 불편해진다. 다급해지고 불안해진다.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괜스레 화를 낸다. ‘저 사람이 왜 저래? 평소에는 안 그러던 사람인데.’ 그러나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스스로도 생각한다.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왜 이래?’ 그런데 좀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도 놀라리만치.

그러기에 우리는 평소에 훈련해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도록.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제하는 훈련을.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성숙된 사람이라면,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속상하다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하지 않던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한때는 예수님의 마음도 모른 채 칼을 빼들던 베드로가 아니던가? 말고의 귀를 자르던 혈기가 어디 갔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혈기는 성령으로 다스려졌다.

살다 보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일이 한두 번이랴. 속이 부글부글 끓게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랴. 그때마다 속을 다 내보여서는 안 된다. 분노를 표출하는 용기보다 속을 감출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자연스러움보다 유익하지 않는 것을 통제할 줄 아는 절제력도 필요하다.

살다 보면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말이 안 되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때마다 부글부글 끓는 미숙함을 보일 건가? 상황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승리를 위해 경쟁하지만 언제나 규칙이 존중되어야 한다. 승부를 넘어 화합과 일체의 감격을 만들어내야 한다. 승자는 패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패자는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순수성이 사라지고 승부에만 눈이 멀게 되면 얼마든지 승부조작도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