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첫 권인 <사무엘상>에 대해 이재철 목사는 “한국 신학자 가운데, 깊은 영성과 신학적이고도 목회적인 폭넓은 통찰력을 이처럼 정확한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한 글은 처음 접했다”며 “단순히 구미 신학의 전달이나 모방이 아니라, 그 토대 위해 ‘신학적 한류’의 물꼬를 텃다는 의미에서 경의를 표한다”고 평가했다. ⓒ이대웅 기자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가 간행된다. 홍성사에서 기획한 이 주석은 ‘우리의 질문과 우리의 해답을 담은’ 한국형 주석을 표방하며, 성경을 깊이 알고 싶은 평신도 독자들을 위해 읽기 쉬우면서도 전문성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성사 정애주 대표는 출판사 회보를 통해 “성경을 해설하되 현재 우리 상황에서 질문을 시작하고, 새로운 신학을 탁월하게 공부한 학자의 글을 받아, 교파를 두루 초월하되 근본적인 신앙인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 20년 동안 소망하며 기다리던 책갈래”라며 “그 기도제목의 첫 열매가 <사무엘상>으로, 책상 위에 놓고 흡족한 마음으로 아끼듯 읽고 있다”고 전했다.

김구원 교수(개신대)가 쓴 <사무엘상>은 일단 주석임에도 술술 읽히고, 정독과 통독이 모두 가능해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한 구절을 설명하면서 사무엘상 또는 구약, 넓게는 성경 전체를 조망하기도 하고,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본문들은 ‘고대 근동학’을 비롯한 도표나 유물 사진으로 보충해 준다. 우리의 질문이 들어가 있지만 편향돼 있거나 특정 입장만을 고집하지 않아 독자층이 넓을 것으로 전망된다. 검은색을 입힌 북디자인도 의미심장하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통독’과 ‘주석’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요. 기획은 출판사의 아이디어였나요.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였어요(웃음). 홍성사는 전통적으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적들을 주로 내는데, 성경을 해설하는 책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저도 학생들이 주석을 소개해 달라고 하면, 추천할 만한 책이 마땅치 않았어요. 학자들의 주석서는 평신도들의 질문보다 전문 학자들의 관심을 반영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열 페이지, 스무 페이지를 넘겨도 붙잡을 말씀이 없어요. 목사님 저자의 성경 해설서들은 보다 친밀하지만, 학문적으로 신뢰하기 힘든 경우가 많지요. 저는 그 중간을 찾고자 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평신도들이 본문을 진지하게 공부할 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해설서를 쓰고 싶었지요.

이 책을 통해 제가 의도하는 바는 본문 해석의 정답을 주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단지 이 주석을 읽는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평신도들이 하나님 말씀 자체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성경을 대충 읽거나 성경에 큰 기대가 없었다면, 이제는 ‘자세히 보면 뭔가 나올 수 있겠다’는 말씀 자체에 대한 관심과 회복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이자 안내일 뿐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 말씀이 존귀해지고, 많은 사람에 의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그저 기복적 신앙생활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즉 나와 내 가족이 복을 받는다면,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도 순종, 저렇게 말해도 순종, 혹은 교회가 이렇게 해도 ‘오케이’, 저렇게 해도 ‘오케이’ 하는 태도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자 말씀을 읽고, 이웃과 나누고, 함께 실천해 가야 합니다. 이 책이 이런 ‘말씀 운동’에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통독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미 설교를 통해 다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요. 교수님은 전작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복있는사람)>에서 이를 ‘무의식적 통념’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을 때, 학생들에게 두 가지 전략을 함께할 것을 권합니다. 먼저는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는 통독입니다. 특히 역사 부분을 여러 번 통독하면 전체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다른 하나는 한 단락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깊이 읽어보는 정독입니다. 정독의 훈련이 병행되지 않는 통독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간 한국교회에서는 통독이 아주 강조돼 왔는데, 어느덧 통독도 하나의 이벤트성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성경 읽기가 자기 변혁으로 이어지려면, 본문을 깊이 읽어야 합니다. 홍성사의 통독 주석 시리즈는 궁극적으로 정독을 위한 참고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이 가능한 주석이지만, 통독하다 보면 정독이 되도록 말입니다.”

▲김구원 교수 위쪽으로 <사무엘상>을 비롯해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가서 이야기> 등 자신의 저서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관련된 질문인데, 성경의 정확한 의미야 어떻든, 내게 당장 필요한 은혜를 받으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도 있을텐데요.

“그렇게 본인이 읽고 싶은 부분만 읽을 때, ‘이게 아니다’ 하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우리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경험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결국 파산할 뿐이지요. 듣기 싫더라도,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이고, 이 과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배우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목사님이든, 신학생이든, 평신도이든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잘못될 가능성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자기 변혁과 개혁에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가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태도가 실종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본인이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모두 판단해 버리고 맙니다. 말씀 배우기를 멈춘 사람들이 이끄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습니다.”

-책을 통해 성경 구절들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런데, 통독의 속도가 너무 느려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통독 주석’이라는 말은 성경을 통독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석서를 통독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책이라기보다, 필요한 부분을 펼쳐보는 참고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 주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할 수 있는 주석으로 의도된 것입니다. 이 책을 통독하다보면, 성경 본문의 정독이 가능해집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까운 지인들과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해 볼 것을 권유합니다. 대여섯 명의 소그룹도 좋고 일대일도 좋습니다. 이 책에는 이해와 토론을 ‘질문’과 적용을 위한 ‘묵상’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경 인물들의 첫 마디가 그 인물의 성격을 어느 정도 드러낸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상이 ‘통독 주석’의 첫 권으로 선택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가장 빨리 쓸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웃음). 제 논문 중 일부가 사무엘상의 ‘한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연구하다 보니, 사무엘상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에 꼭 필요한 메시지들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사 시대와 같이,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시대이고, 영적·도덕적 타락의 예가 성직 계급에서 가장 극명하게 증거되는 시대 같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상을 공부하면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라보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이었지만, 굉장히 적절한 선택이었지요.”

-고대 근동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계시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즉 성경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민족에게 주어진 책이라면, 성경 시대와 그 민족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 근동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성경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근동을 통한 성경 연구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한 번만 언급됐던 왕이 고대 근동 문서에 자세히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고대 근동 문서를 통해 얻은 그 왕에 지식은 그 왕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을 훨씬 잘 이해하게 도와줄 수 있겠지요.

또 고대 근동의 언어에 대한 연구는 성경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모든 히브리어의 의미는 문맥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판가름하게 도와주는 문맥은 우리가 가진 ‘구약 성경’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100번 정도 나오는 단어는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한 차례만 등장한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때, 고대 근동의 언어들이 도움을 줍니다. 고대 근동 언어들을 통해 구약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들의 의미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 관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은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에, 고대 근동 문화에 대한 이해는 성경 본문을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고대 근동의 문헌과 비교 연구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다양한 장르의 글(예: 시, 내러티브, 잠언 등)이 존재합니다. 그 장르적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 본문의 의미 파악에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르들은 오늘날 문학 장르들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고대 히브리인들의 시와 오늘날 영미권의 시는 정의부터 다릅니다. 성경에 사용된 장르의 특징들은 고대 근동의 문헌들과 비교할 때 보다 잘 파악됩니다.”

-이 주석을 읽고 느낀 점은, 말씀하신 성경에 대한 고대 근동적 접근이 매우 ‘은혜로운’ 성경 해설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학문적 분위기는 ‘성경은 고대 근동 문화의 아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니느웨, 왕립 서고에서 창세기와 내용이 비슷한 토판들이 발견됐거든요.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겁니다.

고대 근동학에서 이런 반기독교적 사조가 1970년대 들어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일대 W. W. 할로(Hallo) 교수가 고대 근동학의 학문적 방향을 성경 배경에 대한 연구로 재정립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헌 중, 어느 것이 베낀 것인지 질문하지 않게 됐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나 역사, 그리고 언어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그것이 성경 본문의 이해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할로 이후 고대 근동학은 성경 연구의 적이 아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선 복음주의권 학생들이 구약 연구를 위해 고대 근동학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버드나 예일대 같은 주류 대학 신학과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성서비평학이나 문서설 등을 해야 하는데, 고대 근동학과에서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도 구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학이 ‘성경을 인간의 책으로 보는 게 아니냐’는 오해는 예전 고대 근동학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학자들 중에서도 반기독교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지 학문 전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지난 5월 출판기념회에서 설명하고 있는 김구원 교수. ⓒ홍성사 제공

-각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까 한나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이스라엘 왕정 성립 과정을 주제로 하는 사무엘상은 흥미롭게도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왕이 없었으므로…’라는 말이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이것은 왕정 성립 역사를 담은 사무엘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복선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무엘상의 시작이 무명의 한 여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문제 있는 여인이지요. 그렇다면, 왜 한나 이야기로 이스라엘 왕정의 시작을 알렸을까요?

한나는 절망의 현실을 믿음으로 극복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내용을 자세히 보면, 한나의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 믿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무엘 탄생의 이야기이지만, 스포트라이트는 ‘한나’에 맞춰져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한나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한나가 믿음으로 구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은 후에 왕을 세우는 ‘킹메이커(kingmaker)’가 됩니다.

한나는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하며 성전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절망스런 상황에 믿음으로 응답했을 뿐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의 행위를 구속사의 큰 흐름을 잇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삶의 작은 문제들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할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유혹의 자리에서 죄 짓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을 때 작을지라도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작은 순종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중요한 계기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큰 이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의미에서, 사무엘상의 시작이 한나 이야기인 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무엘상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왕으로 택함받았지만 결국 버림받고 마는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할 자를 뽑으신 것 아닌가요. 책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자세히 설명하시지만, 사울에게는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멸망당한 것은 100% 개인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도 영속적 왕조를 이룰 참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도 한 차례만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해서 주셨어요. 그러나 사울은 그때마다 ‘의도적으로’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잘못했다고 버리는 매정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벌하십니다.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을 끝까지 뿌리쳤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주권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말이 사울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의도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 지옥의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잡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용서하고 받아 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연구 계획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대중을 대상으로 꾸준히 글을 쓰기고 계시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고대 근동 문학 선집>을 여러 명이 번역 중인데,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이집트의 신화, 비문, 서신 등 여러 문서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책으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11월에는 미국성서학회(SBL), 선지서 분과에서 ‘우가릿 문헌에 등장하는 꿈 예언’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 논문은 책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이외에 여러 책들을 계획 중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직접 해설해 주는 책들을 힘 닿는 대로 많이 쓰고 싶습니다.

제게 글을 쓰는 원칙이 있다면, 학문적 논문은 영어로 쓴다는 것입니다. 제 전공은 우리나라에는 저변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 학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씁니다. 한글로 글을 쓸 때는 목사님과 평신도와 소통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어렵게 쓰거나 외국 학설들을 무작정 소개하는 게 아니라, 특히 성경 해석에 있어 한국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쓰려 합니다. 대학을 다닐 때 ESF에서 섬기면서 소중하게 배웠던 것이 이웃에 대해 ‘목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현학적이거나 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글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