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4년 4월 13일
본문: 마가복음 11:1~10
설교: 이수영 목사
제목: 왕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이수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군중이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요12:13) 왕과 구원자로 맞던 그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바로 그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앞둔 때였습니다. 성인 남자 유대인은 매년 중요한 명절을 기해 적어도 세 번 쯤은 예루살렘에 다녀오는 것이 의무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다녀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그 전의 방문과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예루살렘에 가시더라도 조용히 가시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이 되어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했지만(요7:2-3)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다." 하시며 그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시고는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 그 형제들이 올라간 후에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은밀히 올라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7:8-10). 그런데 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시며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당신의 때가 이르렀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21:10-11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마지막 입성을 공식화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셨습니다(본문 1-3절).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정말 집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한 마리 나귀 새끼를 발견했습니다(본문 4절). 그리고 제자들이 그 나귀를 푸니까 아닌게 아니라 거기 서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묻기를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본문 5절).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고는 쉽게 허락을 받았습니다(본문 6절).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고 예수님께서 타시게 했습니다(본문 7절).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고(본문 8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습니다(본문 9-10절).
 
예수님이 타실 나귀 위에 겉옷을 얹어 놓는 것이나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겉옷을 펴 까는 것은 예수님에게 왕으로서의 위엄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는데 "호산나"는 본래는 문자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으로 도움을 간청하며 기도하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호산나" 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부른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한 것은 그를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로 본 것입니다. 또 본문 10절에 보면 사람들이 외치기를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옛 조상 다윗의 영화로웠던 나라를 재건해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실제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한 것은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시118:25-26의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는데 이 시편 구절은 바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여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시118:25-26의 말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한 것은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유대 민족을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구해내시기 위하여 보내시는 메시야로 예수님을 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과 구원자로 환호하며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의 왕과 구원자로 영접을 받으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어울리지 않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슥9:9에서 그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했던 것입니다. 이 예언에서 스가랴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 들어맞을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왕이 임하시는 것"과 "구원을 베푸시는 것"과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언을 그대로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그 메시야, 하나님의 백성의 참 왕이시고 구원자로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선포하시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시기의 예언자로 활약했던 스가랴의 예언은 실의에 빠져있던 유대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에게도 그 예언은 널리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은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도록 보내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자 놀라거나 의아하게 여기지 않고 그를 환호하며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예루살렘 가까운 주변에 살며 나귀 새끼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언젠가 누군가 와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귀를 내줄 마음의 준비가 평소에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귀 새끼를 쉽게 끌어올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우리의 참 왕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확고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처럼 불과 며칠 사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지르는 군중으로 돌변하지 않는 참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왕과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찬양하며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성찬예식을 함께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붙잡히시기 직전 저녁에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이자 최초의 성찬식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성찬예식을 행하며 우리의 참되시고 영원하신 왕이시며 유일하신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고 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