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가 17일 서울 합정동 양화진문화원 목요강좌에서, 지난달에 이어 1956년 ‘우상의 파괴’ 발표 직후부터 1962년 칼럼을 모아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까지의 인생 여정을 풀어놓았다.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와 함께한 이날 ‘인생 대담’을 통해, 이어령 박사는 서슬 퍼런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저항문학’을 추구했지만 4·19 혁명 이후 ‘순수문학’으로 돌아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서 발표한 ‘우상의 파괴’의 부제는 ‘문학적 혁명기를 위하여’였다. 파괴나 우상, 혁명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경력은 1959년 처녀작인 문학평론집 <저항의 문학>과 저항잡지 <새벽> 편집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후 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순수문학론적 접근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을 바라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쓰기 시작했다. 이어령 박사는 이 같은 자신의 문학세계를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언어’와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의 언어’,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언어’ 등 세 가지 언어로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세 개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먼저 나의 언어는 프로메테우스다. 그 언어들은 신과 인간을 갈라놓는, 자연의 질서와 기술의 질서를 갈라놓는 ‘불’의 언어, 즉 반항의 언어다. 또 하나의 언어는 헤르메스다. 이는 대립되어 있는 세계의 담을 뛰어넘고 모순의 강을 건너뛰는 ‘다리’의 언어다. 마지막 언어는 오르페우스다. 상충하는 것을 하나로 묶는 결합의 언어다. 신화 속의 이 세 가지 언어야말로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내 모든 언어의 뿌리였다.”

이어령 박사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 편에서 신과 인간의 질서를 파괴시킨 존재로, 마치 성경에서는 ‘눈이 밝아진다’고 한 에덴동산의 뱀과 같은 것”이라며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가져다준 것은 지혜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과 같은데, 뭔가 새로운 혁명을 하고 진보하려면 프로메테우스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벌을 받을지언정 명예를 추구하고, 버러지처럼 사는 게 아니라 저항하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젊은이들은 가슴이 뛴다. 이 박사는 “데모도 할 수 없고 하다 못해 대자보를 걸 수도 없던 시절, ‘화전민 지대’라는 제목에서 보듯 불의 언어, 파괴의 언어, 반역의 언어를 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4·19 혁명 후 ‘프로메테우스의 언어’에서 양쪽을 접속시키고 소통시키는 미디어 같은 ‘헤르메스의 언어’를 채택한다. 이 박사는 “다이너마이트로는 파괴할 수 있어도 빙산 전체를 부술 순 없듯, 파괴의 언어로는 창조를 못한다”며 “빙산을 없애려면 기후가 바뀌어야 하듯 소통과 미디어로서의 문학, 헤르메스가 지팡이를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전해주듯 작품 분석을 시작했다”고 했다. 마지막 ‘오르페우스의 언어’는 최근 그가 주장하는 ‘생명’, ‘사랑’ 등을 뜻한다. 파괴도 결합도 아닌, 모든 것을 초월해 함께 어우러지는 화해와 사랑의 언어이다. 미워하던 것도 사랑하게 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음악에 감동해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언어이다.

“파괴의 언어로는 상처 씻을 수도, 창조할 수도 없다”

이 박사는 “개인만이 아니라 본회퍼 같은 사람들처럼 교회 역사를 봐도 투쟁의 언어, 투쟁하는 교회가 있었고 젊은이들은 다 그쪽으로 가고, 저도 그랬다”며 “그러나 4·19 이후 혁명의 언어로는 상처를 씻을 수도, 창조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헤르메스가 되어 소통시키고 봉사하려 했지만, 소통만으로는 창조할 수 없었고 오르페우스의 피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 3단계가 제 문학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가족들이 거쳐야 할 투쟁에서 미디어, 창조와 공감의 세계라는 단계”라며 “저는 갑자기 유턴으로 개종해서 기독교를 믿게 되고 생명과 사랑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이처럼 연속선상에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과학이든 정치든 오늘의 서구세계는 좋건 나쁘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기반에 있는데, 이는 샤머니즘과 유·불교를 하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현대를 이해하는 것으로 알 수 없다”며 “유대교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이 용서와 사랑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모세도 주지 못한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언어를 가르쳤을 때 기독교라는 세계 종교가 탄생했다”고 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허공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형식과 율법만 지키고 동정이 없는 바리새주의의 유대교에서는 미래가 없었던 것”이라며 “그러나 성전에서 비둘기 파는 장수를 둘러 엎으시던 ‘저항의 예수님’만으로는 2천년간 이어져 온 기독교가 될 수 없었고, 모세의 종교, 정의의 종교, 율법의 종교로 끝날 것을 예수님께서 사랑과 용서라는 보편적 이야기로 바꾸셨다”고도 했다.

▲이어령 박사와 이재철 목사가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재철 목사는 “오해가 없도록 한 가지 첨언하자면 구약성경에는 용서와 사랑이 있었지만 이를 경전으로 삼은 유대교에 사랑과 용서가 없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를 다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라며 “이 세 가지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 말씀으로, 한 사람의 생각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언어가 진보하고 성숙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이후 <저항의 문학>에서 그 저항의 정점인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직접 거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어령 박사는 “신문사 기자 같았으면 거명했겠지만, 문학가는 복합적 언어로 써야 한다”며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가 그때 사람들을 모두 거명했다면 지금까지 읽히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타고 없어지지만, 헤르메스나 오르페우스의 문화는 1-2천년 후에도 역사를 올라탈 힘이 있다는 것. 그는 “이솝 우화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당시 정치가들을 거명하지 않고 우화적 상징을 썼기 때문으로, 그래서 모든 독재자들을 욕할 수 있었다”며 “지금도 모든 교활함을 여우로, 모든 권력은 사자로 만고에 읽히고 어린아이들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흙 속에…>는 50년간 계속 읽히고 있지만, 당시 ‘조봉암 사형의 흑막’ 같은 걸 썼다면 그때는 베스트셀러가 됐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읽지 않으리라는 것. 이를 그는 “문학은 케이스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비겁해서가 아니라, 당시 ‘이승만’을 거명했다면 문학이 아니라 정치평론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며 “종교와 정치, 문화와 사회적 차원이 서로 다른 것인데, 뒤죽박죽되면 문학도, 정치도, 종교도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언어만 계속 추구했다면 옛날처럼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추앙받고 있겠지만, 헤르메스의 언어로 들어가면서 도중에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다고 현실타협이라는 오해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육체적 구속보다 어려운 ‘정신적 구속’ 인정하지 않는 사회”

또 “이게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겪는 고민으로, 어용으로 가거나 저항으로 해결된다면 쉬웠겠지만 여기서도 저기서도 답이 없었다”며 “기피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의 고민으로, 이는 투쟁이나 옥살이보다 어려운 ‘존재 내부의 옥살이’이고 육체적 구속이 아니라 ‘정신적 구속’”이고도 했다. 이 박사는 “초야에 묻힌 은둔 거사가 아니면 활빈당식 산적이라는 둘 뿐의 이항대립적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라고도 했다.

그는 “홍길동, 임꺽정, 로빈 후드 식의 저항은 아무리 정의롭더라도 절대 현실을 바꿀 수 없고, 재산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길 뿐이지 창조가 될 수 없다”며 “뺏아서 주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인 참된 참여, 영혼의 참여는 항상 좌절돼 왔는데, 이를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이 알아주지 못하면 절망적”이라고 강조했다. “영혼의 독재를 독재라 부르지 않고 신체의 독재만 독재로 알기 때문에 진정한 독재가 생기는 것”이라며 “죽이겠다고 하면 도망갈 수 있지만 삶을 보장하겠다고 하면 벗어날 수 없고, 살려주고 옷을 입혀주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속박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사회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문학가는 천사의 얼굴을 벗겨내 천사가 아니라는 걸 알리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이 박사는 “저는 지금까지 언론인과 칼럼니스트, 문인이자 교수라는 세 가지 역할을 했다”며 “이승만을 문학에서는 거론하지 않았지만 신문사에서는 거론했고, 문학에선 상징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언론에서는 시시콜콜한 현세 이야기를 계속 썼다”고 전했다. 그는 “언론인이 아니었다면 사소한 기쁨이나 악에 대해 눈감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언론인 생활을 하게 돼 현실감각과 높은 차원의 상징적 세계를 잘 어우를 수 있었다”며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줄 알았는데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재철 목사는 “이 질문을 드린 이유는 선생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함으로, ‘시인에게 애국은 시를 쓰는 것’이라며 연이은 정치권의 구애를 거절하신 구상 선생님처럼, 이 선생님도 평생 문학인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세계를 이렇듯 풍성하게 해 주셨다”고 전했다.

▲이재철 목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는 “예수님도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이나 그 시대 랍비들은 책망하시고 마지막 부활에서 만날 자를 곁에 두시던 제자들도 아닌, 누구나 경멸했던 창기라고 하셨다”며 “여러분들도 교회에 나오거나 어딜 가든 흔히 말하는 외형적 선악, 제도적 선악이 아닌 영혼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누가 적인지도 모르고 도와주게 된다. 이 때문에 세 가지 언어를 말씀드린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신문에 늘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이 시간에 왜 여기까지 오셨겠나. 여기는 영혼의 자리”라며 “우리가 가장 많이 잃어버린 언어는 가장 흔한 말인 생명과 영혼, 사랑”이라고도 했다.

이 박사는 “제가 ‘생명자본주의’를 이야기하니 만날 ‘갓길’, ‘디지로그’ 같은 기발한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때 묻은 말, 남들이 다 쓰는 말을 한다더라”며 “그러나 지금 가장 새로운 말이 생명과 사랑으로, 어제도 들은 말이지만 이런 시대에 사랑과 생명을 이야기하는 바보가 나와야 한다. 정말 가까운 곳에 좋은 말이 있는데, 다 변질됐다. 우리는 말이 부족한 게 아니라, 좋은 말들을 모두 사탄이 점령한 게 문제”라고 했다.

이후에는 막스 베버의 ‘덴로흐(dennoch·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해 설명했다. 정치가는 야합하고 부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직업 정치가인 것처럼, 기독교도 ‘덴로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 이 박사는 “제가 예수님 믿고 딸을 잃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지 ‘열심히 믿었는데 왜 데려가시느냐’고 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여러분도 기도드릴 때 절대로 ‘뭐 해 주시면 뭐 해드리겠습니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게 바로 예배의 자리에서 비둘기 팔던 상인과 같은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 ‘덴로흐’, 여러분들도 온갖 부조리와 수모, 불의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이 천국인 줄 알고 살면 큰일난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교회가 사람들이 굶어죽고 어려운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는 말이 옳지만, 교회의 문법에 사회를 끌어들여야지 교회의 문법을 버리면서까지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이는 말만 교회이지 정치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며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하는 것과 바깥으로 나가 세속에 매몰되는 것은 차이가 있고, 시대가 어렵다고 이를 버리고 저쪽으로 가게 되면 이중으로 손해”라고 지적했다.

이재철 목사는 “정치인 아닌 사람에게 ‘정치 문인, 정치 목사’처럼 ‘정치’라는 말이 붙는 게 가장 큰 모욕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