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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십자가

라원기 | 생명의말씀사 | 256쪽 | 11,000원

매년 사순절(고난주간)에는 ‘고난’과 관련된 책을 읽습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를 묵상하며 기도해야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에는 일곱 가지 독특한 관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는 <다시 보는 십자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묵상하게 하는 이 책에서 느낀 것을 장별로 기록해 보겠습니다.

1. 밑에서 본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밑에서 지켜보며 비웃던 사람들의 관점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과거만이 아닌 지금도 십자가를 무시하며 비웃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눈으로 보는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죠.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눅 23:35-36)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고, 군인들은 희롱합니다. 정말 냉소(冷笑)가 가득한 십자가 아래의 모습이었는데,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고 죽음으로 끝나셨다면, 재수가 없어 십자가에서 죽은 정치범 중의 한 명으로 취급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음을 저자는 ‘체크메이트(외통수)’라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악마가 파우스트 왕과 체스 게임을 하면서 “장군”을 불렀을 때 파우스트 왕이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그림인데, 이것은 사탄의 계략에 빠져 도망갈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체스 세계 챔피언인 러시아 사람이 이 그림을 보면서 외쳤습니다. “거짓말이야! 왕이 한 수 더 둘 수 있어!” 그는 체스 전문가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지 못한 또 한 수를 발견한 겁니다.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신 하나님도 그랬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비웃는 사람들과 사탄은 ‘외통수’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한 수를 더 둘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죠. 3일 동안 어둠 속에 계신 주님이 부활하셔서 사탄의 세력을 박살내신 것을 믿어야, 우리는 밑에서 십자가를 본 사람들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위에서 본 십자가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십자가인데,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토록 잔인한 십자가를 허락하셨는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미국의 대공황 때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저자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사랑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낫’을 주며 곡식을 베라고 했습니다. 잠시 일을 하던 소년은 졸음이 와서 낫을 던져 놓고 잠을 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할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손에 채찍을 들고 뛰어 오고 있었습니다. “죽었구나! 저 채찍에 맞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일을 다 했느냐고 물었고, 소년은 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소년이 던져 놓은 ‘낫’을 들어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 나쁜 낫 같으니라고, 내 손자가 열심히 일 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어.” 그렇게 한참 동안 낫을 채찍으로 때리시더니 소년을 향해 미소를 짓고 낫을 주시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사용해 봐라. 말을 잘 들을 거다.” 소년은 웃으면서 “네, 할아버지, 정말 말을 잘 들을 거예요”라고 대답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충 넘어가실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대로 인간을 채찍으로 때리시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자리 십자가에 아들을 대신 매달아서 모든 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아야 할 우리 대신….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신앙과 불신앙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곳은 십자가에 대한 태도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나를 구원하신 은혜와 영생의 사랑이 십자가 보혈의 피에 담겼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서, 항상 신령한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3. 매달려서 본 십자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맥스 루케이도가 쓴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에서 인용한 이야기가 큰 도전이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쓰러뜨린 후, 양팔을 벌려 형틀에 대고 대못을 박으려고 합니다. 이때, 주님은 그들을 제지할 수 없으셨을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손은 바다를 잠잠케 하던 손이었고 죽은 자를 살리시던 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순간 주님은 뭔가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손과 나무 십자가 사이에 긴 목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실수와 정욕, 거짓말, 탐욕의 순간들과 방탕의 세월 같은 기나긴 죄의 목록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죄의 값이 사망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먹을 움켜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그 분의 피로 덮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못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겁니다.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계속 우리의 죄가 눈에 밟히셨기에 못을 택하시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주신 겁니다.

4. 옆에서 본 십자가

이것은 구원받은 강도의 입장에서 본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부인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탁했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마지막에 구원을 받은 것인데 이것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국 문 앞에서 베드로가 질문을 했습니다. “제 질문에 100점을 얻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습니까?” “예, 주일 뿐 아니라 주중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면 2점 드리겠습니다.” “헌금은 잘 하셨습니까?” “예,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렸습니다.” “3점 드리죠.” “다른 것은 없습니까?” “나름대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가끔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래요? 3점 더 드리죠.” 이 사람은 너무 혼란스러웠습니다. 천국 입구까지 왔는데 100점은커녕 10점도 되지 않았고, 베드로는 천국에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고, 예수님,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울었는데, 그 순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100점 만점. 천국에 들어가세요!”

기독교는 ‘선행’을 쌓아서 천국에 가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천국에 가는 종교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내 속에서 본 십자가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 시대에 ‘성령’을 통해 ‘자기 부인’으로 적용되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말씀처럼, 과거의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롭게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에 있는 목사님 집에 잡종 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수의사에게 갔는데 ‘위암’에 걸려서 수술비가 100달러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락사를 시키려는데, 딸이 수술 시켜달라고 계속 애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했는데, 100달러라는 비용을 들이니 그때부터 개의 가치가 다르게 보이더랍니다. 우리도 그렇다는 거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엄청난 것을 지불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때부터 ‘나’의 가치는 높아진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6. 지고 가면서 본 십자가

이것은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직접 지고 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걸어놓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325년에 니케아에서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이스라엘 등 세계 각지 교회 지도자 318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회의 장소에 모인 그들 중 신체가 온전한 사람은 12명이었고, 306명은 신체 중 일부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해서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겁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는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가 네로의 폭정을 피해 로마를 빠져나오는데, 주님이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네가 내 양떼를 버렸기 때문에, 내가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러 로마에 간다.” 이 말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되돌려서 로마로 다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일하게 죽을 수 없다고 하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①자기를 부인하고 ②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③주님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며 신령한 복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7. 세상 속의 십자가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교회 안에 상징적으로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가서 복음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르완다는 전체 인구의 80%가 그리스도인인데,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가장 사악한 종족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전 국민의 86%가 기독교인이지만, 살인율이 개발도상국의 두 배이고, 철장 신세를 지는 국민의 비율이 높고, 폭력과 마약은 모든 도심지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나가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사순절이 지나갑니다. 한 주간 조금 우울한 척하다 끝내버리는 ‘형식적인 고난주간’이 반복된다면, 십자가는 우리 삶에서 능력으로 임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인데, 그 핵심 되는 진리를 가볍게 여긴다면…,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소망을 안겨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뜻섬김지기 이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