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께서 4월 14일 온누리교회(담임 이재훈 목사) 고난주간 심야기도회에서 전한 메시지입니다. 본지는 고난주간을 맞아,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마 16:21, 24, 25)

무엇보다 부족한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심부름꾼으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저녁 이번 기도회 모임의 주제인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해와 평화로 변화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길”을 버리시고 떠나셔서 “고난”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온갖 죄악을 범함으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과 “고난”과 “피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6, 7).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마 2:14, 15). 3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도 “가난”과 “고난”과 “나그네” 길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메시야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시”와 “싫어 버림”과 “간고”와 “질고”와 “슬픔”과 “아픔”과 “고난”과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과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실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3-5).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나타내 보여주신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저들을 향해서 칼을 뽑으려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54).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이 아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나타내 보여주신 모습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죄악의 세력들을 처벌하신 공의로운 심판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모순되게 보이는 듯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악독한 죄인들에게 베푸신 일이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저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로마 군인들은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바라보던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이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늘을 향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백부장은 다음과 같이 회개의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악독한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평생 어디를 가든지 울면서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의인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일은, 자기를 못박는 악독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임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평생 죄만 짓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악독한 강도 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 강도는 신앙고백을 제대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세례도 받지 못했습니다. 착한 일을 해본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악독한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강도가 고백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그런데 악독한 강도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어떻게 이런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독한 우리들 모두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가져오는 놀라운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우리의 죄를 속하시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어린 양 보혈을 흘렸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137). 우리는 또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38).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세상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 25).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또한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과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던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주님만 따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 12). 결국 주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기뻐했습니다. “저희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 41)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말로는 십자가를 예찬하면서도 실제로는 싫어하며 거부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면서 감성적으로는 십자가를 예찬하고, 유창하게 설교를 하면서 이성적으로는 십자가를 예찬하면서도 실제로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기를 싫어하며 피해서 가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고난”도 “핍박”도 “멸시”도 “천대”도 “죽음”도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며 피하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처음에는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며 거부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십자가의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그런데 배신과 거부의 길을 걸어가던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회개하고, 그 후에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결국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중에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면서 동료와 후배들에게 이런 권면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14,16). “십자가의 길”은 즐거워하며 기뻐하여야 할 길이고 영광의 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제일 먼저 걸어간 사람이 스데반 집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받으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가슴과 입에서는 자기를 향해서 이를 가는 악독한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와 저주가 쏟아져 나오는 대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증언만을 쏟아 내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5, 56). 그리고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쏟아내면서 저들을 위한 사죄의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 60). 스데반 집사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매우매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간절한 호소의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대로 다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처럼, 스데반 집사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 핍박자이자 박해자였던 사울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결국 사울이 예수와 십자가만을 전하는, 사도 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와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놀라운 길입니다. 자신에게는 영광의 길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원과 복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그 다음에 걸어간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 세상의 유익하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고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 2).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인 가문이나 학문이나 종교적인 열심 등도 모두 배설물로 여기며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사도 바울은 또한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1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 11:23-27).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고, 예수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사도 바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 “십자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 덕분에 로마 시대에 살던 수많은 악독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 덕분에 성 어거스틴도, 칼빈도, 길선주 도사도, 이기풍 깡패도,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그리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의 또 한 사람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시면서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던 서머나 교회를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 2:8, 9).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귀중한 권면의 말씀을 하시면서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그런데 서기 155년경,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서머나 투기장에서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폴리캅 감독이 바로 계 2:8에 기록된 “서머나 교회의 사자”였을 수 있다고 추리하고 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주님께 받은 권면대로 “죽도록 충성”하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는, 로마 총독의 명령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서머나의 투기장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폴리캅이 군중 앞으로 끌려왔을 때, 총독은 그가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경건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총독은 계속해서 예수가 신인 것을 부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없소.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총독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야수들을 가지고 있다. 네가 마음을 고치지 않는 한 나는 너를 그들 가운데 던지겠다”고 말했습니다. 폴리캅이 대답했습니다. “야수들을 부르시오. 우리에게 변절이란 있을 수 없소” 총독이 다시 폴리캅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야수들을 멸시하고 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불에 태워 없애버리겠다” 폴리캅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위협하는 불은 한 시간 동안 타고 곧 꺼질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악한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이렇게 지체하시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빨리 하시오.” 폴리캅이 이와 같이 말했을 때 그는 용기와 기쁨으로 넘쳤고 그의 얼굴에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총독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폴리캅을 산 채로 불에 태우라고 했습니다. 폴리캅은 나무 단 위에 끌려와서 하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천사들과 권세들과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께 찬양을 돌립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올립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이시며 영원한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과 성령과 함께 당신에게 지금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사람들이 불을 붙였습니다. 폴리캅은 “십자가의 길” 즉 “순교의 길”을 참으로 귀중하고 아름답게 걸어갔습니다. 폴리캅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은 자신에게는 영광의 길이 되었고, 서머나와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과 오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함께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게 하는 놀라운 복된 길이 되었습니다. 사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붙잡은 말씀이 바로 폴리캅이 붙잡고 걸어간 계 2:10 말씀이었습니다. 풀리캅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걸어간 사람들 중에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분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 또 한 사람이 주기철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길선주 목사님의 뒤를 이어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하시다가 순교하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이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선봉에 서서 반대해서 1938년 2월 경찰에 1차 검속되었다가 27일 만에 석방되었고,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대구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으며, 1939년 8월 3차 검속되었다가 9개월 후인 석방되었고, 1940년 9월 다시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 산정현교회로 달려가서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한 다음 마 5:11-12과 롬 8:18, 31-39을 봉독한 후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종목의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의 기도와 설교를 삶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준, 삶과 죽음의 목회였습니다. 그의 기도와 설교,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충성의 길로 순교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충성과 헌신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살고 천 년 살면 무엇합니까?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하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올시다…….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아! 내 주여!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님은 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하시면서 하늘나라에 가서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하시는 동안 주기철 목사님의 음성은 울음으로 떨렸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려 내렸다고 했습니다. 교회당에 가득히 모인 교우들도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40년 9월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며 온갖 고문을 당하시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참으로 귀한 한국교회의 목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 또 한 사람이, 주기철 목사님의 수제자였던 손양원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릴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나중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계 2:10 말씀을 붙잡고 감옥에 붙잡혀 가서 온갖 고초를 당했으며, 마지막에는 총살을 당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과 영혼에 지니고,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자기의 부모나 처자보다 더 사랑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품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고, 자기를 총살한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숨을 거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없어서 자세하게 하지 못합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순수하고 충성된 마음과 영혼을 지니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심으로, 못난 우리들이 아직까지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지 않고 은혜와 긍휼을 입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십자가의 길”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기보다는, 즉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기도”와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전력하기보다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시고 울면서 회개하시면서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애를 쓰셨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면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고 있다고 방지일 목사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님도 지난 수 년 동안 십자가 복음 신앙의 회복을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이 2012년 1월 한복협 월례모임에서 십자가 신앙의 회복을 강조하신 말씀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어려워지고 혼탁해지고 교권 다툼, 세속주의, 기복신앙, 물량주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십자가 신앙에 대한 철저한 무장이 되어 있지 않고 철저한 자기 반성과 회개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신앙은 철저한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 신앙은 섬김과 나눔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매우 귀중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오늘 밤 여기 귀한 기도회 모임에 와서, 감히 전할 수 없는,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이 세상 죄악에 사로잡혀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없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없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슴도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고 피하려고 하는 못된 기질과 성품만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스데반 집사님과 사도 바울과 폴리캅 감독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못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