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아> 포스터.

20일 개봉한 영화 <노아>를 봐야 할 이유는 많았다.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일 뿐더러, 무려 1억3000만 달러(1393억8600만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엄청난 규모, 러셀 크로우(노아 역)·제니퍼 코넬리(나메 역)·엠마 왓슨(일라 역)·안소니 홉킨스(므두셀라 역) 등의 열연 등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노아’, 바로 ‘노아’가 아닌가.

노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위로’ ‘안식’ 등을 뜻한다. 당시의 세상에 대해 성경은 “죄악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지경이었다”면서도, 유독 노아에 대해서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죄악의 홍수로 뒤덮인 끔찍한 세상에서, 노아만은 그 이름대로 하나님께 ‘위로’와 ‘안식’이 되는 존재였는지 모른다.

<노아>를 관람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기독교인이라면, 오늘날 폭력적·자극적 문화의 홍수 속에 성경적 문화 콘텐츠로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랬다. 앞서 개봉된 미국에서는 이 영화를 본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느꼈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그래도 ‘노아’ 아닌가. ‘썩어도 준치’라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어디 가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영화를 봤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같은 기대와 예상을 철저히 배신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영화는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다.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하고 성경 속 사건들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뿐, 성경의 주제 및 교훈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특히 이 영화 속 주인공 노아는 시종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노아의 소명과 사명, 그리고 방주를 짓는 작업의 의미 등 성경적 교훈에 대해 이 영화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타락한 인류를 철저히 멸절시키고야 말겠다는 노아의 강박증과 광기다.

이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창조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계시를 받았다는 노아조차 막연한 꿈을 꾸었을 뿐이고, 심지어 그 꿈에서조차 하나님의 의도와 명령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를 ‘무신론적’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두발가인’을 비롯해 영화 속에서 노아와 대립하는 인물들조차 ‘창조주’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들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마자 노아의 예언이 실현됐음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방주를 향해 달려드는, ‘믿음 좋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노아>는 ‘반신론적’이다. 이 영화는 홍수 심판의 불가피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않는데, 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류의 죄악상을 그리는 대신 혼란상을 보여 주고, 그 혼란의 주범들이 “하나님 탓”을 함을 통해, “도대체 인류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토록 잔인한 심판을 하셨었나요?”라고 하나님께 따져 묻는 듯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방주에 타기 위해 질주하는 사람들. ⓒ영화 <노아> 中

교인들에게 신앙적 교훈을 주기 위해 <노아> 단체 관람을 계획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면, 그 계획을 신속하고 심각하게 재고해 보길 권한다. 물론 신앙적 이유가 아닌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이 영화를 보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미’만을 고려한다 해도 이 영화를 자신 있게 추천하기는 주저하게 된다.

우려되는 점은 <노아>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노 내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 교회에서 적절한 지도를 해야 할 것이다.

<노아>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 굳이 구체적으로 알려야 할 필요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