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를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른다. 황금처럼 고귀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17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황금률’이라는 표현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가 이 구절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하였고 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교훈은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율법은 구약의 첫 부분인 오경(토라)을 의미하고, 선지자는 역사서(전기 선지서)와 선지서(후기 선지서)를 의미한다. 곧 그것은 구약 전체 성경의 요약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구원하신 목적도 남을 대접하는 것에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시면서 세 가지 약속을 주셨다. 큰 민족을 이루는 것과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 등이다. 첫 두 가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받을 복의 약속이라면, 마지막은 그 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다. 곧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줄 복이라는 것이다. 남을 대접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큰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훈련시키시는 과정 속에서도 남을 대접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예수의 제자 양육 방식은 당시 랍비들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랍비의 명성을 듣고 스스로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제자로 부르셨다. 그런 자세는 부활하시고 마지막 승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실망하여 옛 직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마지막 당부를 전해 주셨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먼저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는 분이시다. 남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남을 대접하는 자세의 기본이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첫 단어인 ‘그러므로’이다. 헬라어 접속사 ‘운’은 앞에서 언급된 것의 결과를 의미한다. 바로 앞부분에서 강조된 것은 기도에 관한 교훈이다. 기도는 남을 대접하려는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기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거룩한 목적이 있어야 바른 기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여기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기도의 지속성과 간절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강조와 함께 기도해야 할 내용에 대한 구분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구하라’는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것을 간구한다는 뜻이다. 그릇은 준비되어 있는데, 그 안에 채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고프고 목이 마를 때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다. 예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1).

‘찾으라’는, 무엇인가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귀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의미와 목적과 사명과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허비하고 있다. 영적인 깨우침을 통하여 자신의 바른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을 두드리라’는, 무엇인가 닫혀 있어서 원활한 소통이 막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늘 함께 동행 하시기를 원하는데, 중간에 막힌 담이 있어서 영적 교제가 막히고 복의 통로가 닫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회개의 기도이다. 닫힌 문이 열기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않겠느냐”(마 7:11)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좋은 것’은 우리의 기준과 기호에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은 그것이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은 어느 것보다 우선적으로 구할 우리의 기도 제목이다.

우리의 기도는 남을 대접하기 위한 목적 위에 세워야 한다. 기도의 내용은 구할 것도 있지만, 찾아서 회복시킬 것도 있고, 막힌 것을 열어 소통시킬 것도 있다.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좋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