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신학연구원 신원삼 원장

진정한 사랑은 자기 이웃부터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은 사랑하지 않고 멀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이웃의 허물이 보이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사도 베드로는 권고하기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하였고, 사도 요한은 지적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고 하였다.

허물 많은 이웃을 사랑하려면 이를 덮어줄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불가한 것이다. 허물을 덮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마음에서 우러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않고는 우러나올 수 없는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고 하였다.

이웃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에서 실현되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묻는 어떤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론적인 사랑보다 실천된 사랑을 볼 수 있다. 불한당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한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도 버리고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 10:25-35)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물론 신령한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사랑을 본받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여기서 깨달아야 할 바는 이웃을 ‘끝까지’ 돌보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끝까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사랑하는 사랑이다. 이론에 밝거나 말끝마다 사랑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으로 이웃부터 사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하여야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고.

전의 신학원 원장 신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