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2년 11월 25일
본문: 디모데전서 6:6~10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물질로 인해 관계가 깨어졌을 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디모데전서 6:6-10]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재정적 파탄의 원인
돈의 문제는 단순한 물질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과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곤란함과 재정적 실수로 말미암은 파탄은 단순한 “없음”의 문제를 떠나, 책임 소재로 비난하기 시작할 때 깨어진 관계로 더 큰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몇 달 전 어떤 목사님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목사님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목사님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30년 가까이 목회를 하는 동안 한 번도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한, 정말 헌신하며 목회했는데, 자녀를 키우는 동안 교회에서 한 번도 도움을 받지 못해 평생 일하며 살아왔던 그 사모님의 마음에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 다른 목사님에 비하면 늘 상대적 열등감으로 힘들어했습니다.
목사님이 너무 착한 분이라, 교인들에게 요구할 줄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목사님이고, 그 사모님도 최선을 다해 사는 분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물질에 대한 부족함이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목회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물질의 문제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그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기도하고 싶었고 기도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좋은 목사님이 물질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교회와 교인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해서 목사님에게 잘 해주는 것일까요?
아니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참 힘들겠지만, 원망이 아닌 감사의 마음이 찾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저와 같이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람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제 설명으로는 그분의 마음에 평안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6절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단어인데요. “자족”과 “경건”입니다.
먼저 경건이란 성경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차원의 단어입니다.
내가 “경건하다!”라고 말할 때는 단순히 도덕적이거나 자제력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되려면 불만이 없어야겠지요? 서로에게 불만이 있는데, 특히 상대방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중요한 진리라 느끼는 부분이 시편 37편 4절의 말씀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결국, 성경에서는 물질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에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물질의 문제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되고 고백되는 문제입니다.

자! 그러면 “자족”이라는 말에도 주목해 보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자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족”을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족은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달란트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달란트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우리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 많이 경험하는 재정적 실수가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므로 자족하는 마음을 잃고, 경건을 잃으므로 초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정적 문제의 해결을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그리고 올바른 신앙관을 회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진 관계는 회복될 수 있고, 경건이 회복되면 올바른 물질관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재정적 파탄의 원인이 무엇인가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하려 하는”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물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에 대한 부분입니다. 가만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세요.
물질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물질이 없었으면 욕심내지 않았을 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혹은 불로소득을 노리고 행한 일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이 축복이 되지 못하고 시험과 올무가 된 것입니다.
주식투자를 하면서 손해를 보는 사람의 대부분이 주식이 오를 때 팔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점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 보려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으로 저점을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물질에 관한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물질이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필요한 때에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사고 팔 때도 집값이 얼마냐에 집중하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아까워서 포기하지 못한다.”라는 말은 참 미련하게 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리더십 책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죽은 말에서 빨리 내려와라!” 아무리 아까워도 죽은 말은 달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참 교회의 이곳저곳을 많이 고쳤습니다. 물론 저에게 남다른 지혜가 있어서 5년 10년을 내다보고 완벽하게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미래를 생각하다 현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 실수할 수 있지만, 현재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겠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아니,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돈을 사용할 때 “부하려 하는 욕심”을 극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말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부하려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이 열심히 살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중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인 축복을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부하려는 마음이 시험과 올무가 되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린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저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잘 쓰려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모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돈을 사용하려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신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얼마 전에 두란노에서 나온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우간다에서 단기선교사를 지원해 온 한 젊은 아가씨의 이야기입니다.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지고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그녀가 우간다 어린이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삶에서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3살의 케이티는 이미 14명이 아이들을 입양한 엄마고, 400명 이상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이와 관계없이 그것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그녀의 삶을 바꿔놓은 것은 돈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살았던 돈이, 그렇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주말에 한주 외식하는 돈이면 어떤 나라에서는 한 식구가 한 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놀랐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도 아이 하나 학교를 보내기 위해서 일 년 수입의 3분의 1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도 보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쓰는 돈과 누리는 것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시험이 되고 올무가 되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우간다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가 케이티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돈을 사용하며 그것은 유혹과 올무가 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죠. “목사님 예수 잘 믿으세요!”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런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돈을 잘 쓰세요!”
재정적 실수의 원인이 결국은 돈을 사용하는 문제보다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요?

잠깐 말씀드린 케이티를 보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목회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굳이 제 삶을 변명하자면, 직접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바꿔놓는 일도 귀한 일이요,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달란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적나라하게 생각해보죠.
부하려고 하는 욕심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재정적 실수와 그로 말미암은 관계의 불편함을 만들어 냈는지.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서 앞으로 고갈될 국가 재정의 위기를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실제 돈이 모자란다는 것보다 누구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보면서 정말 커다란 위기로 느끼는 것은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교회들이 건축을 하며 지은 부채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이러한 열정과 욕심이 우리 사회를 만들어 놓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 이 욕심이 올무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이런 재정적인 문제를 시작했고, 실패했다!”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 실패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돌려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족을 생각나게 하고, 물질의 은사를 생각나게 하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죠.
하루는 하나님께서 닭과 개와 돼지를 불러서 "너희는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봉사하다가 올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후에 닭과 개와 돼지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닭이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 사람이 열심히 일하기는 하는데 시간을 몰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꼬끼오!'하며 새벽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쁘셔서 닭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닭은 상으로 받게 된 벼슬을 항상 자랑하며 흔들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 개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도적이 많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만 이상한 사람이 보여도 '멍멍!'하며 힘껏 짖음으로 집을 지켜 주었습니다."
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3개의 다리를 가진 개에게 다리 하나를 더 주었습니다. 다리 하나를 선물로 받은 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네 번째 다리가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에 용변을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하사받은 다리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꼭 다리 하나를 들고 용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돼지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먹고 자고 놀다가 왔습니다." 돼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저 돼지의 주둥이를 단칼에 치라." 그리하여 한 천사가 하나님의 명대로 돼지주둥이를 칼로 잘라버려 돼지의 주둥이가 없어지게 되어 코와 입이 붙어 하나가 되었고, 그 결과 돼지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숨이 막혀 곤란하여졌습니다. 돼지는 자신의 코와 입이 붙어 있어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한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돼지 머리 놓으면 복 받는다'는 거짓 풍설을 퍼뜨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을 받겠다고 돼지 머리를 잘라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넙죽넙죽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상에 올려진 돼지는 넙죽넙죽 절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에 너무 웃음이 나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잘라놓은 돼지머리는 일편단심 변치 않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닭은 닭으로써, 개는 개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닭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꼬끼오'하고 새벽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개는 '멍멍' 짖으며 도둑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는 개처럼 살고, 닭은 닭처럼 살고, 돼지는 돼지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도 꼭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제 삶을 고백하는 것이 도움 될 듯합니다.
제가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만나 교회 목사로 사역하면서 청빈하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단지 만나 교회 목사로서 살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해외에 다니는 문제로 교회에서 항공료를 대주는 문제, 그리고 제 아내와 동행할 때의 문제를 가지고 재무부장 장로님과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방법에 대한 문제인데, 제 아내의 항공료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이죠. 제가 충분히 아내의 항공료를 낼 수 있는 형편이죠. 제가 어디 나가면 사례비도 받고, 결혼 주례하면 주례비도 받고.
그런데 저는 교회에 요청을 했습니다. 제 아내는 저와 함께 사역을 하는 사람이고, 저를 지켜주는 것도 큰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행기를 탈 때 비즈니스석을 돈을 내고 타는 사람도 아니고, 마일리지가 있으면 업그레이드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석 타고 다니고.
그런데 제가 제 문제를 잘 압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써야 할 것 때문에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리라는 것을.
저에게 원칙이 있습니다.
제가 받는 사례비를 헌금으로, 제가 받는 주례비를 헌금으로 다 교회에 냅니다. 제가 모아서 쓰는 것보다 제가 가지지 않고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을 교회에서 해 주시는 것이 저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이 하도 무서워져서 사람들이 목사님이 교회 돈을 어떻게 쓰느냐고 시비를 걸면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 앞에서 유혹이 되지 않도록,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돈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지 않고 부하려는 욕심, 하나님의 관계를 상실한 사람들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돈을 사용하려는 마음들이 유혹과 올무가 되어 깨어진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요?

문제는 회복의 방법이다!
재정적 문제의 해결은 철저하게 신앙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미국의 워렌 위어스비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이 '자족하는 마음'을 가리켜 "자족하는 마음은 마치 온도 조절기와 같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은 온도 조절기가 아니라 온도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온도계와 온도 조절기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온도계는 환경에 따라 움직입니다. 날씨의 더위와 추위에 따라 자동으로 온도계 바늘이 변합니다. 즉, 온도계는 외부 환경에 따라 움직일 뿐, 온도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온도 조절기는 그 반대입니다. 바깥 날씨가 추우면 온도를 올려주어 실내가 춥지 않도록 조절해 줍니다. 바깥 날씨가 더우면 반대로 온도를 내려주어 실내가 덥지 않도록 조절해 줍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왜 이 말이 경건과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환경을 바꿔놓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온도조절기처럼 말입니다.

재정으로 깨어진 상처와 관계는 이렇게 새로운 신앙의 관점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물질은 주인이었는가? 아니면 도구였는가?
물질의 깨어짐이 여러분의 삶을 망가지게 한다면 그것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도구였다면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고치고 회복되어야 한다는 일로 인식될 것입니다.
물질을 우상이 아닌 도구로 고백하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 만족해하는 자족하는 삶이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은 저절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족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에 자족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족하는 삶을 배웠다고 합니다.
또 12절도 보겠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기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에서 '일체'란 NIV 영어성경에서는 'In any and every situation'이라고 번역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어떠한 환경 가운데', '모든 상황 가운데'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모든 상황 가운데 있든지,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 걸렸는지 모르지만,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모르지만, 그는 마침내 자족하는 삶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의 가장 위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우리가 그 동안 꿈꿔왔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의 백미는 “믿음으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어떤 문제도 나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유혹 혹은 올무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물질이 나에게 우상이 아니므로 흔들리지 않겠으며, 물질이 내 사명을 대신할 수 없으며, 물질이 우리의 가족 관계를 절대로 깰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모든 것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결국, 재정적인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믿음의 행동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환경적인 요인으로 온 것이든, 우리의 삶에서 실수와 욕망으로 일어난 문제이든, 형통할 때뿐 아니라 우리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는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살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이삭은 주변의 모든 사람처럼 애굽으로 내려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을 보세요. 창세기 26장 2-3절 말씀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우리가 원하는 것하고는 조금 다르죠.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기근을 피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기근을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참고 견디는 동안 함께 하시고 오히려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꼭 배워야 하는, 아니 우리 가슴에 새겨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물질과 삶의 고통의 시간을 당하는 동안 세상 사람과 같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간다면 “경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뭄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고 하나님과 멀어질 때, 너는 그 땅을 지키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는 것이 약속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뒤흔드는 것이 무엇인가요?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을 보며 비교하기도 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환경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실수와 억울함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지 못합니다. 단지 그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나와 있는 요셉이의 이야기를 보세요. 요셉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결국은 애굽의 2인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가 노예로 팔려가 고통이 시간을 보낼 때도 하나님은 역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존 파이퍼라는 미국의 목회자는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이든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든,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 하나님은 숨어 있는 죄를 드러내어 우리로 회개하고 정결하도록 하고자 원하신다.”
물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양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면, 회개해야 할 수없이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 믿음의 고백이 있다면, 경제적 어려움과 실수, 때로는 실패의 경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켜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물질의 문제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만족도, 어려움도 우리의 삶에서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견딜 수 없는 물질이 곤고함 가운데서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가난과 물질의 고통을 통해 물질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심으로, 여러분에게 주실 물질이 잘 쓰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닥치고, 요셉이 억울한 누명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기쁨으로 맞이하도록 하셨던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희 집에는 지금 수입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해야 하나요?"
수입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합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주인이 누구냐?”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고 살아가느냐의 신앙고백이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입의 많고 적음과 헌금의 많고 적음에 대하여 묻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넉넉하게 베푸는 자에게 넉넉하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베풀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보다는 베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인색하지 않게 베푸는 사람들은 재물로든 영적으로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목회 25년의 경험으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물질에 인색해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물질은 세상의 것인데, 어쩌면 물질의 쓰임이 영적인 관계와 그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말입니다
정직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찾아온 인색한 마음이 과연 하나님과 정직하게 “경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제가 감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분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경제적 파산을 딛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얼마든지 같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회복은 물질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돈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