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유일한 길이지만 사실 기도를 해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은 횟수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기도응답 받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바로 하여 바로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조건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교리서인 “교리문답”은 기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그 말만 들어도 복잡해서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5만 번 기도를 하고 응답받은 조지 뮐러라는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5백 번도 5천 번도 아닌 5만 번 기도를 응답받은 것을 실제로 기록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5만 번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기도에 6가지 원칙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원칙을 보니까 첫째로,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공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위해서 대속하신 그 은혜를 확신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기도 전에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죄를 자백하는 회개했다. 그는 기도하기 전에 혹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막힌 죄악의 담이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 그 죄악을 회개하고 기도를 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졌다. 흔들리지 않게 주의 말씀은 진리요, 거짓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넷째,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난 다음 빨리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끈질기게 견디는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섯째, 작고 사소한 일들도 기도하는 섬세함을 가졌습니다. 큰 일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뢰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여 은혜를 베풀 수 있게 하는 비밀한 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로 하여 응답받기 위해서는, 먼저 지켜 행할 계율이 있습니다.

<본론>
1. 죄를 회개해야 한다
첫째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는데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최대 장애물이라는 것인데 이 죄를 회개하고 나가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친구와의 대화도 서로 죄를 지어서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대화가 안 되지 않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라도 서로 마음이 뒤틀려 있으면 대화가 안 되어서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풀어야만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해서 이사야 59장 1절로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고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 듣지 않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은 죄는 어떠한 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는 죄는 하나님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우상에 절하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도 우상으로 절을 하면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권위에 손상을 가져오는 말을 하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장난으로 모욕되게 권위를 상실시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주일날을 주님 섬기고 예배드리는 이 날을 반드시 지키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반드시 지켜야 될 약속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이 돌아서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 다음의 죄는 이웃과 사이에 지은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가족이 부모 자식 간, 형제 간에 벌써 이웃이 아닌 것입니까? 그와 동시에 우리 이웃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데 이웃 간에 지은 죄도 회개하고 주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웃이 내게 저지른 죄악을 회개할 때 용서해 주어야 내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루에 일곱 번 씩 일흔 번 죄를 짓고도 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거든 용서해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회개해도 하나님이 용서 안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 주는 것 쉬운 것 같아도 쉽지가 않습니다. 나에게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이 나중에 와서 내 잘못했어. 용서해줘. 그럴 때 여러분 쉽게 용서해 줄 마음이 생기느냐.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렇게 하겠지 싶어도 실제 당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놈의 자식 너는 나에게 상처 줘놓고 난 다음에 이제는 쉽게 용서해달라고 하느냐?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결심하고라도 이웃이 회개하면 용서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의무를 등한히 한 죄,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을 안 한 죄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를 사마리아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돌리고 그냥 갔었습니다. 지가 잘못해서 얻어맞고 피투성이 된 것 안돌아본 것이 무슨 죄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뒤에 따라오다가 보고 역시 지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그를 보고 짐승에서 내려서 이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게 안 해도 죄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내가 반드시 해야 될 수 있는 안할 때 하나님이 섭섭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이 헐벗고 굶주렸을 때 내가 빵이라도 나누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지가 굶주리는 것 내가 책임질 것 뭐냐. 내버려 놓으면 하나님이 섭섭하게 여기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기쁘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이것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안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불순종의 죄인 것입니다. 인격적인 죄인 것입니다. 내 인격 속에 부패성이 있어서 이 부패성이 나타나서 상처를 입힐 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로 31절에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엄청나게 더러운 것이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이 평소에는 모르겠으나 어떤 일에 부딪히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도 우리가 회개해서 내가 깨닫는 한도 내에서 정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탐욕과 욕심의 죄도 우리가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야고보서 4장 1절로 3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요사이 묻지마 살인이 처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이 어려워지고 경제적인 형편이 나빠지기 때문에 나보다 잘 사는 사람, 행복하게 사는 사람에 대해서 우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탐욕과 욕심이 들어오면 탐욕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자기의 분수 이외에 원하는 것을 말하고 욕심도 꼭 같은 것입니다.

탐욕과 욕심의 죄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이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필요한 것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주시고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내어가지고서 그것을 가지고 내가 호화사치하고 탐욕을 따라 살려고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탐심과 욕심의 죄도 회개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만과 교만의 죄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1장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오만한 것은 자기 분수 이상으로 잘난 체하고 교만해서 다른 사람 앞에 눈에 거슬리게 하는 죄도 회개하고 나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오만과 교만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오만하고 교만해서 죄를 짓고도 안 지은 체 하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나서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로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가 없다고 말한 사람 있습니까? 스스로 속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없다는 사람은 다시 거짓말하는 죄를 더 보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용서하거니와 죄를 변명하고 감추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죄라는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굉장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 주님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로 14절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똑같이 기도하러 왔어요. 교회 와서 기도하는데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교만과 오만이 꽉 들어차 있는데 하나님 앞에 어깨를 펴고 고개를 높이 들어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와 같이 담대하게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들어볼 때 대단하잖아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는 다 내고 자기는 살아갈 때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큰소리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세리는 남의 돈 떼먹고 세금을 탈취하고 죄를 많이 지은 아주 더러운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와서 가슴을 치고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하는 말이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봐도 나는 죄인이고 이웃이 봐도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이 봐도 나는 죄인인데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는데 우리 사람이 볼 때는 누가 더 의롭습니까? 바리새교인이 더 의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아니하고 세리와 같지도 아니함을 감사하는데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이 사람이 죄만 짓고 남의 돈을 탈취하고 나라 돈도 떼먹고 세금을 많이 부과해서 차액을 자기 포켓트에 넣고 하는 이 세리보다는 의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 두 사람이 성전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때 누가 더 의롭다함을 입었느냐. 이 세리가 더 의롭다함을 입고 나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게 낮추고 겸손해서 회개와 자복하고 통회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고 귀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제일 먼저 이와 같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신앙상담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안수기도를 하는데 한 분은 하나님께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자복합니다. 내가 볼 때는 상당히 의롭게 산 사람같이 보이는데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마음에 자복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번만 더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더 크게 일하겠다고 간구하는데 제가 안수를 하는데 하늘 문이 열리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응답이 쩌릿하게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는 내가 기쁘게 받아준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기도는... 그래서 제가 죄인들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 함께 안수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이 내 마음에 느껴질 정도로 임하는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회개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해도 입술의 발린 말로써 입만 발랑발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보여 주는 것 참 좋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눈물도 보시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주시고 우리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막연히 기도하면 마귀가 와서 너 응답 못 받는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그러면 낙심되잖아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지 않습니까? 마치 큰 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려서 바위를 안고 있으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나무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씀을 가슴에 안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민수기 23장 19절에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의심이 자꾸 생겨요. 왜냐,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감각으로도 의심이 생기고 마귀가 와서 자꾸 공격을 하므로 의심이 생깁니다.

그 의심이 생길 때 말씀에 기록하였으되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씀을 따라서 기도한다. 그렇게 할 때 담대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 말씀에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이용해서 마귀와 대적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생각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로 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되지 내 생각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계획이 많고 생각이 많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하나님 생각을 따라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지 하나님 내 생각대로 내 원하는 대로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요, 희망을 주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기를 원하고 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올바르게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나님 뜻에 따라서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님을 섬기고 성경 말씀을 읽어서 말씀의 약속이 마음속에 꽉 있으면 말씀을 붙잡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이루어지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끈질기게 붙잡고 나가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3. 불퇴진의 결심, 끈기와 믿음으로 나아가라
셋째는 우리가 한번 기도했으면 불퇴진의 결심과 끈기와 믿음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쉽게 물러가면 아무것도 안돼요. 한번 시작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안 된다. 응답 못한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결코 물러가지 않고 끈질기게 견디고 참고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3절로 8절에 한 도시에 과부가 있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한에 사무쳐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그가 재판장에게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재판관이 가만히 보니까 이 과부가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과부가 와서 부르짖는다고 누가 응답합니까? 옛날의 재판관이란 아주 독재적인 사람인데 그래서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출근할 때도 와서 문간에 기다리고 있다가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퇴근할 때도 그곳에 또 꿇어앉아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속해서 부르짖습니다.

그러니까 이 재판관이 나중에 꿈에도 이 여자가 나타나요. 꿈자리가 시끄러워서 잠도 잘 못자겠어요. 너무 자꾸 자주 오니까. 그래서 이 여자가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 힘도 없는 과부지만 밤낮으로 와서 부르짖으니 내가 번거로워 견딜 수가 없다. 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그렇게 하고 이 여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보다 낫지 않느냐.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자기 택한 자가 와서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어찌 응답해 주지 않겠느냐. 속히 응답해 주리라. 그러나 문제는 내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끝까지 믿고 응답해 줄 줄 알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기다리며 부르짖지 아니하고 조금 기도하다가 안 되면 마음에 의심을 가지고 물러가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의 기도처럼 우리는 끈질기게 확신을 가지고 응답받는 꿈을 가슴에 확실히 품고 응답 안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브라함이 별들을 헤아리고 네 자손이 별들처럼 많을 것이라 말하니 그것을 믿은 것처럼 여러분 응답을 이미 마음속에 받은 줄 알고 마음속에 확실히 품고 응답이 없는 답답한 시간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가슴속에 응답을 품고 있으면서 그를 생각하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를 잉태한 어머니는 당장 어린 아기를 낳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기를 잉태했으면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마음에 품고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집중적으로 이 과부와 같이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반드시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로 38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 뒤로 물러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았었습니다. 실패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면 하나님이 손잡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우리 여호수아기 6장 2절로 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 그냥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그 군대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엿새 동안을 한 바퀴씩 돌고 이레째는 여섯 바퀴를 돌고 일곱 바퀴 때 고함을 치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내를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인내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진중에 와서 잠자고 기다렸다가 이튿날 또 한 바퀴 돌고 일주일을 한 바퀴를 돌고 칠일 째 여섯 바퀴를 돌고 일곱 바퀴째 고함을 치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무너질 때 다 이스라엘 칼날에 죽음을 받았으나 기생 한 가족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평안히 감추어준 공로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조건이 이스라엘 백성이 성에 들어올 때까지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기생이 자기 가족들을 집안으로 모아놓고 엿새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데 얼마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얘가 기생하더니만 정신이 돌았다. 우리를 집으로 오라더니만 엿새 동안 못나가게 한다. 오빠도 나가겠다. 동생도 나가겠다. 그런데 앞을 막고 뒤를 막고 절대 못나간다. 이 성은 무너진다. 엿새 후에 무너진다. 그러므로 못나간다. 그렇게 막은 그 공로가 대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이 성을 무너뜨릴 것을 믿고서 인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과 인내인 것입니다. 믿고 참아야 돼요.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견디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리고성 돌기처럼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성 돌기를 한다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4. 감사를 넘치게 하라
여러분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 감사를 넘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도 감사하고 받을 은혜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생각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하나님의 생각인 것입니다.

죄 사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허물을 용서하고 성령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주어서 형통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부활 영생 천국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요, 이 땅에 살 동안에 전인구원을 받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생각이므로 이런 것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인 생각, 감사하는 생각이 마음에 넘쳐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주신 응답을 생각하고 이미 받았던 옛날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 제사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고 그를 통해서 영화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하나님 앞에 원망, 불평, 탄식하면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원망, 불평, 탄식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하고 욥에게 축복을 주니까 마귀가 와서 말하기를 욥이 왜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합니까? 물질 축복을 주어 형통하게 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당장 욥에게서 자식들을 빼앗아가고 물질을 빼앗아가고 부부간에 헤어지게 하고 몸이 병들게 하면 돌아서서 욕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언제나 유익을 위해서 나가기를 원하고 유익을 안 주면 욕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렇게 많이 합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축복을 못 받으면 원망, 탄식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빈손 들고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마땅하다. 복을 받았으니 화를 입는 것도 마땅하다고 입으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장성하면 원망과 불평을 적게 합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한 사람은 쉽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철이 들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많이 하고 감사와 찬송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많은 일에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철든 신앙을 갖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싸움의 무기는 입술의 고백이다
그 다음에 우리의 무기는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입술의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입술로써 묶고 입술로써 풀어놓는 것입니다. 매고 푸는 것이 입술의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없는데 궁창이 있으라. 궁창이 생겨나고 없는데 바닷물이 생겨나라고 하니 생겨나고 짐승이 생겨나라고 하니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른다고 하니까 없는 기쁨을 있는 것처럼 나는 기쁩니다. 슬픕니다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기쁩니다. 나는 좋습니다. 나는 복 받았습니다. 나는 형통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저 돌았구나. 정신이 좀 왔다갔다하지 않느냐. 왔다갔다 하는게 아니라 올바르게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복 주실 때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람,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고 이름을 바꿔라. 그리고 너 아내 이름은 사래가 아니라 사라, 많은 자식의 여주인으로 바꿔라. 자식이 없는데 여보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여, 많은 여주의 어머니여...

서로 그렇게 부르니까 이웃 사람이 들었을 때 완전히 치매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100살 먹은 노인이 90살 먹은 할머니를 보고 많은 자식의 어미여, 그 노인 할머니는 남편을 보고 많은 민족의 조상이여.. 미쳐도 완전히 미쳤구나. 혼자 미친 것이 아니라 둘이가 똑같이 미쳤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렀죠. 없는 자식을 있는 것같이 서로 부르니까 100살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름도 여러분 좋은 이름을 가지고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은 굉장히 축복인데 나는 이 개똥이라는 이름 참 이름 지을 것이 없어서 왜 개똥이라고 이름 지었습니까? 내가 물었습니다 그 부모 보고... 왜 이름을 개똥이라고 지었느냐고 그러니까 자식을 낳으면 자꾸 죽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면 귀신이 와서 물고 가므로 개똥같이 취급을 하면 안 데려갈까 싶어서 이개똥이라고 불렀다고... 그러니 세상에서 개똥같은 취급을 받지 않습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면 그대로 된다구요. 내 입의 말이 여러분의 운명을 좌우하고 환경을 만드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싸움의 무기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난 다음에 받은 줄로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몸에 병이 들어서 병이 낫기를 원하셨으면 나은 줄 믿고 입술로 고백해서 나는 건강하다. 나는 튼튼하다. 나는 씩씩하다. 나는 병에서 나았다. 나는 힘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와서 묻잖아요. 좀 요사이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아직 아파요. 그렇게 말을 하면 여태까지 하나님 앞에 주여, 내가 건강합니다라고 말한 것이 헛수고가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질문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도 요사이 늘 보면 성도들이 와서 목사님, 보니까 건강하게 보여서 좋습니다. 설교할 때 보니 건강하게 보이던데 어때요? 건강해요? 그러면 마음에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처음에는 그 유혹에 끌려들어가서 아니 사실은 별로 건강 안해도 건강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네가 건강 안하다고 했으니까 안 하는데로 될지어다. 그래서 회개하고 요사이는 건강해요 그러면 건강합니다. 무조건하고 건강합니다. 씩씩합니다. 좋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마귀가 와서 너는 약하다. 너는 못한다. 안된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고 몸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씩씩하다. 나는 튼튼하다. 나는 괜찮다.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 물러가라! 따라 말씀하세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고백하라. 우리가 기도는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습니까? 부르짖으셨으면 없는 것이 응답받은 것처럼 있는 것처럼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사랑이 없어서 내가 사랑을 좀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나중에 기도하고 난 다음에 나는 사랑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합니다. 사랑이 풍족합니다. 그렇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직장이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으면 나중에 나는 직장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이 있습니다. 다 탐하는 직장이 내게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고백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창조적인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창조적인 선언을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직장은 생겨나라. 건강은 생겨나라. 기쁨은 생겨나라. 평안은 생겨나라. 창조적인 명령을 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시인할 뿐 아니라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입술로 명령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생겨나라. 좋은 일이 생겨나라. 행복이 생겨나라. 그렇게 명령하면 그 명령대로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기쁨이 생겨나라.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실제로 기쁨이 생겨나라고 웃으면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겨나라고 박수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 좋은 일이 생겨나지요. 그러므로 우리 기도의 결과는 입술의 고백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입술로써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명령하고 이루어진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입술의 명령과 시인이 여러분에게 큰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여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말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많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십시다. 큰일도 구하고 적은 일도 구하고, 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고서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고 명령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서 여러분 모든 생활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역사가 보여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기도드리겠습니다.

/ 2012. 8. 26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