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아마도 단군조선 이후로 가장 국가적인 자존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천년 동안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거대한 중국 등 북방민족과 남쪽의 일본 틈바구니 사이에서 쉴새없는 침략을 받으면서 국가적 위기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은 비록 반쪽으로 분단 상태에 있긴 하나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이후 매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의 축제인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그 존재 가치를 당당히 드러내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개최와 더불어 축구 4강 진출의 신화를 이루어내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금메달 13개를 따내 10위 안에 들어간 것을 시작하여, 이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세계인의 인기종목인 축구 동메달을 따는 등 초반부터 종반에 이르기까지 4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다가 막판에 러시아에 추월당하여 5위를 하였다. 이 사실은 올림픽에서의 한국의 선전(善戰)이 우연히 한 번 있었던 성과가 아니라, 한국이 지닌 역량이 드러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복싱이나 역도나 레슬링 같은 대체로 후진국의 주요 종목을 넘어서서 주로 선진국의 주요 종목인 펜싱, 사격, 수영, 그리고 체조(양학선의 도마 금메달, 손연재의 리듬 체조 결선 진출) 그리고 각 구기종목 등에서 골고루 메달을 따게 된 것은 국가의 지원이라는 정책적인 뒷받침(동메달 이상 군면제, 연금 지급 등)이 있었기에 메달이 가능한 종목이었다. 올림픽은 인류의 화합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결합된 인류의 제전이기 때문에 메달 획득수는 그 나라의 국력을 드러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2011년) G20 개최, 올해(2012년) 세계핵안보정상대회의 의장국이 된 것이 바로 한국이 세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1. 전체 메달 수로 평가해야

그러나 올림픽 본부에서 하는 것처럼 금메달 위주로 성적 순위를 평가하기보다는, 미국이나 일본이 계산하는 것처럼 메달 전체 수(금, 은, 동)에서도 보아야 한다. 총 메달수로 하자면 미국(104개), 중국(87개), 러시아(82개), 영국(65개), 독일(44개), 일본(38개), 호주(35개), 프랑스(34개)에 이어 한국(28개)은 9위를 하였다. 중국이 메달 경쟁에서 2위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중국의 국가윤리지수는 아직도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구미(歐美)국가에 한참 못 밑친다. 미국 언론은 런던 올림픽 메달 순위 1위를 달리는 중국 스포츠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선수들을 누르는 무거운 부담이 중국 올림픽의 성공에서 기쁨을 빼앗아간다”(NYT) “오로지 승리를 목표로 한 중국 스포츠 시스템이 선수들 집에는 눈물과 고통을 낳고 있다”(WSJ). 금메달을 체제선전의 수단으로 활용헀던 ‘소련식 스포츠 시스템’으로 금메달 획득에만 몰두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국제사회에 줄을 이었다. 중국은 정치 사회 면에서는 자국민 뿐 아니라 탈북자들에 대한 인권 억압과 고문을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 유린되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권 억압국가이다. 북한은 메달 6개(금 4, 동 2)를 땄다. 그러나 북한은 1996년 이래 수백만명이 기아로 굶주리고 탈북자가 속출하는, 인권 열악의 국가다. 올림픽 스포츠는 그 나라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 우리나라가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이번에도 5위를 했다고 자찬(自讚)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문 방송은 올림픽 기간 동안 온통 올림픽 보도와 순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던 데 반해서, 미국에서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지 일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신문이나 방송이 한 모퉁이에 언급하고 있는 정도다. 올림픽 성적은 참가 선수 각 개인의 노력의 성과에 관련시켜 이해하는, 참고 정도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이 힘과 지혜를 모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국가적인 잠재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2. 안정된 품격(品格)사회의 조건

이제 한국사회는 외형적인 수치로 팽창과 발전을 과시하는 피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내실적으로 품격 있는 안정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내부적으로 안정된 사회란 중산층이 두텁고, 빈부의 격차가 적어지고,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되어 있고, 사회적 도덕성과 윤리성의 지수가 높은 사회를 말한다. 이런 사회를 이룰 때 우리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세계 10위에 드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나 대중문화(K-Pop)에 있어서도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으면서 옛날 극동의 변두리 나라에서 세계문화와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안정된 품격사회는 국력만이 아니라 윤활유같은 윤리적 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은 졸부(猝富)의 나라나 단지 스포츠 강국만이 아니라 문화의 나라요 예의와 윤리가 바른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품격있는 사회가 되기 위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해본다.

1)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첫째, 사회적 상류층이 먼저 못 가진 자들을 위하여 나누고 봉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상류층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을 행사하고 서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는 후진국이다. 영국 사회는 명예혁명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도 왕권이 명예적으로 존속한다. 이번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런던 올림픽 개회 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영국은 어찌 보면 귀족들이 이끌어 가는 사회다. 그러나 오늘날 영국이 민주주의의 모델 사회가 된 것은 영국 귀족들이 사회적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이들 귀족들은 사회적 위기 상황이 닥쳐올 때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을 희생하였다. 귀족들의 자제들이었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출신들은 세계 1차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어느 클래스의 경우에는 그 해의 동문들이 거의 전사(戰死)한 것을 기념한 비(碑)를 본 적도 있다. 한국사회에도 일제시대 이회영, 경주 최부자, 유한양행의 유일한 등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수많은 선조들이 있다. 이회영은 한일합방을 당하자 가산을 정리하고 가솔(家率)을 이끌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경주 최부자는 “사방 1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家訓) 아래 무려 3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고 나눔을 실천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곡식을 베풀었다. 유일한은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했고 정직하게 납세한 기업가로, 가진 자의 의무를 몸소 실천한 기업인이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으나 대기업은 이윤을 남기나 중소기업은 너무나 어려운 시기에 있다. 오늘날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은 세계적 불경기 때 중소기업의 애로를 들어주어 공생공영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2)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

둘째, 중산층이 두터워지도록 부(富)의 분배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당시 1인당 국민소득 80불)보다 잘 살아서 1963년에 장충체육관을 지어준 필리핀(당시 1인당 국민소득 240불)이라는 나라가, 50년 후 오늘날 왜 그렇게 낙후(우리 국민소득의 1/10)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 보니까 소수의 족벌(族閥)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것이다. 1987년 장기 독재자 마르코스가 물러났고 민주화되었으니 발전하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오늘날 필리핀은 5%의 족벌들이 그 나라의 부의 근(近) 90%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한다. 대통령도 족벌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런 빈부와 계층의 격차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적 안전망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신문보도처럼 한국인 관광객 상대로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사회다. 내가 아는 필리핀 선교사도 택시 강도에 당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지난 1997년 IMF를 겪으면서 중산층이 무너지는 어려움을 당해 왔으며,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을 넘어 3만불을 향해 간다지만 경제성장의 과실배분에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제대로 몫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 성장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도시빈곤층(working poor)들이 적지 않다.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에 남겨진 신문지를 수집하러 다니는 생계(生計)형 노인들의 모습은 아직도 성장의 그늘 아래서 전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적지 않은 빈곤층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하려고 하는 의욕있는 선한 시민들의 삶의 의욕을 북도아주는 대책이 세워지고, 일할 수 있는 자들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경제 민주화”라는 말들이 12월 대선 슬로건으로 나오고 있다. 대선 출마자들은 단지 표를 얻기 위한 선거용 공약 아닌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현성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3) 공권력 존중

셋째, 기초질서 유지 공권력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다. 미국인이 자유를 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공권력이 존중되고 강하며, 필요시 집행된다는 것이다. 이 자유의 나라에 입국할 때는 아주 까다롭다. 테러사건과 관련된 나라의 사람들에 대한 입국절차에는 아주 까다롭게 신분확인을 진행한다. 그러나 일단 미국이라는 사회에 들어가면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나라라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사회가 자유로운 것에는 공권력이 그만큼 존중된다는 것이다. 데모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선(police line)이라는 것이 있다. 그 선을 넘어서게 되면 경찰은 그를 체포한다. 자유스러운 사회 분위기이긴 하지만 필요시 공권력이 법대로 집행되기 때문에 다민족이 사는 미국 사회가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고, 선량한 시민들의 권익이 그만큼 보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경찰은 강하다. 우리 한국은 “경찰이 술 마신 사람에게 매 맞는 나라”다. 심지어는 경찰이 데모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나라다. 한국은 경찰의 윗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권한이 많고 아랫 계급에는 권한이 적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아래 일선경찰이 가장 무섭다. 그만큼 법을 위반한 자들에 대한 공권력 집행이 일선 경찰에게 위임되어 있다. 미국은 국민들이 실제적으로 자유를 누리는 나라다. 왜냐하면 경찰의 공권력이 집행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도 시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경찰이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5월부터 노숙자 주(酒)폭(暴)과의 전쟁과의 전쟁을 시작한 경찰은 술만 마시면 서울역 인근에서 상인과 행인 등을 상대로 행패를 부린 노숙자 주폭 5명을 구속하자 술 취해 행패부리는 노숙자들의 숫자가 눈에 뜨게 줄어들고 서울 역의 풍경이 확달라졌다(조선일보, 2012년 8월 13일 월요일 A1). 서울 역 시민체감 안전도가 두달새 5월 38점에서 8월 68점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조선일보, 2012년 8월 13일 월요일 A11). 이제 우리 사회도 시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공권력의 바른 사용을 장려해야 한다.

4) 술 문화 개선

넷째, 술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술먹고 행패부리는 잘못된 관습이 없어져야 한다. 주(酒)폭(暴)은 공권력을 훼손하고 서민생활을 침해하는 사회적 위해범죄다. 우리 사회는 정이 많은 사회여서 그런지 잘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 “그 당시 술이 취해서 그렇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여 넘어가려는 관습이 있다. 우리 사회가 한(恨)이 아직도 많아서 한을 달래고 술을 먹는 관습이 있어서 술 먹고 행패부리는 것에 대하여 관대한 문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국력이 약하여 외부의 침략(고려, 조선, 일제, 한국전쟁 등)을 받고 한(恨)이 쌓여있을 때의 문화다. 이제 한국은 올해 6월 20-50 클럽에 들어간, 선진사회의 문턱에 들어선 나라다. 이러한 술 문화를 고쳐야 한다. 여름에 야외나 해변가나 강가, 산골에 나와서 술먹고 고함지르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5) 각종 범죄에 대해 신고하는 시민 정신

다섯째, 주변에 일어나는 사회적 범죄(각종 성추행, 성 폭력, 아동 학대, 부정 부패, 비리 등)에 대하여 즉각 신고하는 시민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치안(治安)이 잘 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민주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회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과 범죄가 동시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 특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범죄나 불미스러운 일에 관하여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하여 신고하는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또는 선량한 시민이 패걸이에 의하여 봉변을 당했을 때, 이를 저지하거나 재빨리 신고하는 시민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특정한 의인(義人; 일본 지하철에서 술취한 승객을 구하고 자신은 죽은 이수현 씨 등)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 사이에 갖추어져야 할 사회적 의식이다. 20년전 안식년 연구차 미국 예일대 체류시 기숙사에 있었던 일이다. 독일에서 남편이 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부부가 미국에 와서 의견차가 있어서 서로 다투어서 조금 큰 소리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단숨에 학내 폴리스가 와서 문을 따고 남편되는 연구원을 데리고 갔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에 경찰이 오느냐 생각할지 모르나 미국인들의 문화에는 그러한 분위기는 가정 폭력으로 인정된다. 그만큼 사회적 문화의식 지수가 우리보다 높다. 미국에서 이민 온 한국인 부모가 가정 교육상 아들에게 벌을 주려다 이웃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의하여 체포당하는 사건 등이 그 예다. 그만큼 미국은 신고가 재빨리 이루어지는 사회다. 그러니 신고정신이 투철한 사회에서는 사회안전망이 든든해서 모두들 안심하고 살 수 있다.

맺음말

이러한 도덕적이고 윤리적 의식의 수준을 올리는 데 한국 기독교는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감사(感謝)하고 나누고 섬기는 개신교 윤리다. 기독교는 이 윤리를 “박애”(博愛)라고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될 때 사회를 위한 봉사, 솔선수범, 나누는 생활, 공동체 정신, 금주(禁酒) 내지 절제 생활, 불의에 대한 고발 정신 등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시민단체들이 이러한 운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필자가 속해 있는 샬롬나비(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가 시민운동으로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런던 올림픽에서 보여진 신장된 국력을 선용하여 먼저 우리 사회의 안정과 시민의식을 함양시키고, 다음에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고, 나중에는 동북아 평화의 주역이 되는 시대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