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제21장 강박증의 유형과 치료적 대응(4)

강박증은 행동으로 유발되는 경우와 생각으로 유발되는 경우로 대별된다. 행동은 물론 생각을 바탕으로 하지만, 증상의 특징에서는 행동적인 면을 주로 진단을 내리거나 생각을 주 원인으로 보고 진단을 내리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행동적인 강박증과는 달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중심으로 하는 강박증을 위주로 다룰 것이다.

1. 양심적 강박증

양심적 강박증은 주로 양심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강박적 증상이다. 생각만의 작용은 바로 순수하게 심리적 강박증을 시사한다. 순수하게 심리적인 강박증은 외현적인 강박행동이 나타나지 않지만 생각이 강박증적이다. 이때 또다른 내면의 목소리가 대화를 시작한다. “아니야…, 아무도 그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거야. 너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한 거야. 아니야, 아니야…, 순전히 너 때문이야. 네가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면 비겁하게 너만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야…, 비열한!” 이러한 내면의 ‘전투’는 일단 시작하면 서너 시간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앞에서 예를 든 환자의 경우 처음의 목소리는 자신을 비판하고 힐난하는 내용으로, 일종의 강박사고에 해당하는 작용이다.

1) 증상의 특징

양심적 강박증은 고도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다.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칙과 규칙을 잘 지키려 한다. 양심적 강박증은 규칙에 위배되거나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 불편한 심리를 경험한다. 이런 양심적 작용은 단순히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뿐, 뇌에서는 동일한 효과를 일으켜 불편감을 일으키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여기서 제시하는 양심적 강박증 및 그 변형들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여러 성격적 특성의 조합을 나타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강박증은 특성상 양심적 측면과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하고 철저하며 사람이 보는 관점을 넘어 스스로 규제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기에 규칙을 어기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심리적 괴로움을 경험한다. 이는 양심의 가책을 더 많이 받아 심리적으로 불편해진다. 양심적 강박증은 우울증이 그 경계선이 모호한 것과 대조된다.

따라서 양심적 강박증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특성이 있다. 이들은 어떤 다른 강박증 유형보다 순응적이고 의존적이며, 규칙과 권위에 대한 순종이 두드러지고, 타인의 관심과 가치와 희망에 기껏 동조하고 순응하는 모습이 전형적이다. 이들은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으며, 독립적 자기주장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대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기꺼이 순응하고 동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들의 자아상은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신중하고 사려 깊고 협력적인 사람으로 보이며, 겸손하고 순수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도 있다.

2) 심리적 이해

정신에 문제되는 증상이란 하나의 특성만을 위주로 하지 않는다. 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고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정신의 증상은 그 성격상 대개 여러 특성들이 혼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강박증도 거의 모든 다른 성격적 특성들과 혼합되어 나타난다. 강박증에는 우울증상과 편집적 증상 그리고 심하면 어느 정도의 망상도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따른 증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신경이 예민하게 작용한다. 신경의 예민성은 그만큼 자신의 행동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의식하는 만큼 긴장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는 양심적 강박증이 언제나 부적절감이 깊게 내재되어 있는 현상이다. 심리적 부적절감은 이완되지 않은 긴장적 측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늘 자기의 모습이 부적절하게 비춰지지 않을까 과민하게 신경쓰고 염려한다.

때문에 이들은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단호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다. 그리고 때로는 융통성 없이 경직된 방식으로 행동하며, 어떠한 행위의 경로를 밟는 것에 대해서도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성실하고 의무감이 가득하며, 근면하고 세심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규칙적인 사람들이다. 더욱이 다소 지나치게 공손하고, 심지어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실패하거나 타인의 비판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러한 위험이 느껴지는 상황에서는 상당히 긴장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둘째로 감정을 지나치게 통제한다. 양심적 강박증은 감정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편이다. 이들은 적절한 것을 추구하며 경직되고 억제된 태도의 배후에는 강렬한 양가감정이 잠복하고 있다. 이들은 좀처럼 자신의 양가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고도로 훈련받아온 자기통제의 그늘 밑에 꽁꽁 묶어둔다. 그 통제의 결과는 다음의 특징을 드러낸다. 즉 바로 자발성과 융통성이 결핍되고 종종 우유부단하며, 시간을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고, 일상이나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게 될 때 쉽게 당황하게 되는 것 등이다. 평소와 다른 거슬리는 자기감정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하려 하며, 불쾌한 사건에 의해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완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의심이나 자존감 저하로 고통받는데, 이를 종교적인 조직과 같은 제도에 집착하고 그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보상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신앙으로 보상하려는 동기에서 자신의 행위를 신앙적으로 권위적인 인물의 행동과 동일시하려 한다. 또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행동은 최소한으로 제약하고, 승인된 규칙이나 제약을 엄격하게 따르려고 노력하며, 변화없는 일관적인 행동 패턴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완벽주의적 태도나 사소하고 부적절한 사항들에 집착하는 경향이다. 이런 경향은 마침내 자신의 부적절성을 직면하지 않도록 도와주며 부정적인 자기상으로 인한 자존감의 손상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 준다.

셋째로 심리 내면에 갈등이 많다. 이들의 내면세계에 자리를 잡은 보다 중심적 갈등이 있다. 그것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과 모험적인 행동에 대한 두려움이다. 스스로 자신이 결단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견을 참각하는 편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한 것에 대하여 자신감이 없다. 자신감 없는 측면이 바로 심리적인 갈등을 유발시킨다. 자기가 바라는 이상은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을 추진하고서도 그 일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런 확신은 알고 보면 사실상 책임성에 대한 것이다. 즉 그들은 잘못을 두려워하며 그 책임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반복적인 일을 지속하며,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은 일이나 새로운 과제에 대해서는 늘 불안감을 느낀다. 이들의 '양심적인 특성'은 심층에 자리를 잡은 부적절감, 잠재적 실패에 대한 근심과 염려, 더 나아가 이들의 갈등은 더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즉 내적인 부족감 및 다루기 힘든 충동 표출 등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더욱이 양심적 강박증은 매우 소심하고 세심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이들이 직면하는 과제가 그러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비난과 비판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이들의 내면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내가 얼마나 깊이 없고 속이 빈 사람인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도덕적이지 못한 충동이 억제된 것을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매우 협소하긴 하지만 더없이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자 노력한다.

3) 치료적 대응

양심적 강박증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측면이 고려된다. 지나치게 양심적인 현상은 엄격한 도덕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양심의 문제는 초자아와 관련시키고 있다. 양심의 불안정은 어떤 경우이든 간에 과도한 초자아의 억압으로 설명한다. 자아가 부모의 권위, 사회적 법률이나 도덕성에 억압되어 위축당한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학파의 입장이지만 현상적으로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다음은 양심적 강박증에 대한 치료적 대응의 요건이다.

첫째로 양심불안을 극복해야 한다. 양심적 강박증은 양심불안에 따른 심리적 반응이다. 양심불안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특성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양심은 법률이나 도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특성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대하며 감정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비하에 빠지게 된다. 양심불안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과도한 규제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부모의 억압과 통제라는 측면이 지나치게 양심적이게 만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치게 양심적이게 된 병리적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부모나 가까운 주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지 못한 측면을 생각한다. 만약 신앙인이 양심적 강박증이라면 아마도 죄책감에 질 때마다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고정된 기도문을 반복할 것이다. 게다가 기도문은 늘 똑같은 억양과 어조로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언제나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충분히 미소짓지 않고 충분히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긴다. 그러면 자신이 무례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두 시간 이상씩 기도문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기도문을 외우거나 숫자를 세는 행위는 심리적 강박행위의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관점의 유연성을 시도하라. 양심적 강박증은 스스로 내면에서 통제하는 특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내면의 통제는 유연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질서나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불안감을 느끼고 괴로움을 경험한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외부적인 기준을 위배하였다는 것 보다는 자신의 심리적인 원칙이 무너졌다는 불안감에 기인한다. 그러니까 외부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내면이 허물어진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스스로의 무너짐이 공포감을 조장하는 원천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돌발 상황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려고 하며, 잘못될 수 있는 일을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때로 우리 일상생활은 시계처럼 돌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는 늘 해오던 적절하고 올바른 길을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처럼 경직된 외부기준을 추구하고 집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효과는 자기 내부의 수용하기 힘든 대립적인 충동이나 감정, 양가적인 갈등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여유롭게 해야 한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인물 두 사람의 대조적인 예를 들 수 있다. 푸른 소나무처럼 올곧게 살아 독야청청하던 성삼문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를 읊으며 매사에 융통성을 갖던 이방원과의 대조이다. 이런 경우 양심적 강박증에는 성삼문의 독야청청보다 이방원의 융통성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잘잘못을 따지는 태도보다 양가성을 수용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반항심과 순응에 대한 뿌리 깊은 양가적 요구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상황에서는 상당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내면에 대한 양심적 기준에 경직되게 집착하기보다 더 여유로운 유연성을 보일 때 이러한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자신감을 갖도록 한다. 자신감은 모든 행동의 기초이다. 양심적 강박증은 현상적으로는 생각만의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내면의 자신감의 결여에서 비롯되고 있다.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확신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양심적 강박증이 확신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그래서 이들은 매사에 잘못될까 염려하게 된다. 이들의 우유부단함, 소심하면서도 예민한 성격적 측면이 모두 자신감이 없음에 바탕하고 있다.

자신감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확신할 때 생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확신해야 한다. 이런 자신감은 반드시 능력의 문제에 비례하지 않는다. 여자라면 자신이 가진 여성적 특성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남자라면 자신이 가진 남자다운 기품을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쌓은 지식이나 기술을 지나치게 상대화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자신의 가치를 소박하게 평가하여 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므로 자신의 단점이나 결점을 그렇게 크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특히 양심적 강박증에게는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유달리 죄책감을 느끼는 자세도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다만 그것을 실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양심적 강박증은 '강박적 반복행위'와 함께 나타나므로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이는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양심적 강박증에 대한 자기방어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신앙인의 경우에는 '좋으신 하나님'처럼 일정한 어구를 안정감이 느껴질 때까지 무한정 속으로 반복하여 평안함을 회복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확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 청교도적 강박증

청교도적 강박증은 주로 신앙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강박증상이다.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의 근간이 되는 경전이나 가르침들이 심리적인 면을 제한하는 현상이다. 양심적 강박증은 양심이 기준이 되고,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이 기준이 된다. 둘은 기준은 다르지만 현상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모두 사회적이거나 외부적인 것보다, 내적인 규칙 위반이 더 비중있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인의 경우 ‘신앙적 양심’이라는 용어 사용도 가능해진다.

1) 증상의 특징

청교도적 강박증은 철저한 신앙인에게 나타난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엄격하고 독선적이며 상당히 자기통제적인 성격을 보이며, 적절성이나 권위에 대한 갈등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이를 순응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신앙이 바람직하지 않고 과도하거나 지나치게 되면 과도한 양심불안을 일으킨다. 열심히 잘 믿어보려고 할수록 대단한 도덕성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물론 양심불안에 기초하지만 대개 경전을 근거로 하는 불안감이라는 점이다.

‘성적인 생각’으로 고생하는 남성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여성들을 쳐다보면 그 여성의 벗은 나체를 순간적으로 연상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은 물론 단순한 연상이다. 음흉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 신체의 부분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일순간 막연하게 상대방 위로 살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연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그 여자의 나신을 생각했다”고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성경에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죄악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하루에 수도 없이 만나는 여성들을 보면서 그런 음란한 생각을 하다니…’ 하고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경전의 한 구절은 그의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그래서 그는 이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씩 기도하고,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거나, 숫자를 계속해서 세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이 더럽고 본성도 더럽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고 그런 생각을 더욱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기도 하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손등을 꼬집고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지만 기분만 더 나빠질 뿐이었다.

2) 심리적 이해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적 영역에서 이해된다. 철저한 신앙인에게 신앙 때문에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증상은 신앙적으로 엄격하고 독선적인 것과 관련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영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에 치중한 나머지 이른바 세상적인 것을 거부하려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신앙적인 원칙이나 윤리적인 것이 그 삶의 기준이 되어 있다. 이런 기준에 위배되면 지나치게 양심적인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말로 신앙적 양심이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청교도적 강박증을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요건들이다.

첫째로 신앙적 기준에 정위되어 있다. 모든 일의 기준이 철저히 신앙적이다. 신앙적인 가치만을 그 기준으로 삼고 모든 삶의 중심이 신앙적이다. 세상을 신앙적으로만 보려고 하며 신앙이 곧 그 사람의 양심이요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의심, 강박적 사고, 심한 비판적 태도 등을 나타내곤 하는데, 이를 통해서 이들의 내면에 자리를 잡은 강렬한 분노를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은 ‘의로움과 도덕성’이라는 수단을 통해 분노를 표출할 통로를 찾아내게 된다. 이들에게 비도덕적이고 적절하지 못한 대상은 내면의 분노감을 표출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서적인 불편감이나 심리적인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강하게 저항하며, 이러한 내면의 고통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긴장감이나 극도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나타내곤 한다. 남을 비판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다. 더 나아가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갈등을 일으키는 속성을 발견하며 기회는 이때라 생각할 만큼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청교도적 강박증은 공적으로 자기 내면이 노출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이라고 예상하면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절하나 자기처벌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며 분노감을 쏟아붓는 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분노통제와 표현의 이러한 내면적인 갈등은 이들에게 언제나 불편감을 일으키며 통제 상실에 대한 위협감을 느끼게 한다.

둘째로 삶의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다. 청교도적 강박증은 삶에서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다.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조이다.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영적인 삶만이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도 이런 이중적 구조는 삶에 중요하게 작용된다. 그러나 이중적 구조는 실제로는 모든 삶이 영적이라는 신앙적 일변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관점은 사실상 신앙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들에게 문제는 이 세상의 삶을 신앙이라는 영적인 틀에만 집어넣으려 시도이다. 그러니까 더 넓은 삶을 좁은 신앙의 틀로 억지로 쑤셔넣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다 보니 억지와 부자연스러움이 자주 경험된다. 이들에게 삶은 이분법적인 것, 즉 신앙적인 삶과 세상적인 삶으로 구분될 뿐이다. 그리하여 신앙적인 삶이 가치 있는 반면 세상적인 삶은 무가치하게 생각된다. 청교도적 신앙을 강조하는 부모는 도시의 복잡한 생활이 신앙생활에 방해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칼 로저스(C. Rogers)의 부모는 그 때문에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사하게 된다. 도시의 생활은 농장의 생활보다는 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흙의 정직함이 인간의 정직함이며 땀흘려 얻는 수고의 열매는 자녀에게 보람으로 심겨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가족의 분위기는 비교적 친밀하고 따뜻한 편이지만 엄격한 신앙적 분위기를 유지할 것이다. 신앙에 입각한 활동이 부모의 인정을 받는 것 때문에 자녀들의 생활은 자유로운 분위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신앙적 분위기에서는 아동으로서 난잡한 행동은 금지당하고 신앙적 행동만 장려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경건한 신앙적 삶을 사는 것이 그 목표가 된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적 삶을 살고자 하면 세상과의 갈등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특히 무엇보다도 신성모독적인 내용의 생각이 떠오르면 고통을 겪을 것이다. 또 깨끗하고 건전한 삶을 살고자 하면 난잡하고 변태적인 성행위의 생각이 많은 괴로움을 줄 것이다. 이는 개인이 그 생각을 과도하게 통제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이다.

셋째로 신앙적 신경증의 증상이다. 청교도적 강박증은 지나치게 신앙적으로 집착되어 있기에 신경증적이기 쉽다. 신앙의 신경증적이란 신앙의 계율을 잘 준수하거나 경전에 위배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기에 그것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철저하게 신앙적인 삶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기적인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 더욱 큰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마음으로 느끼는 강박관념이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강한 편이다.

생각만의 작용은 바로 순수하게 심리적 강박증을 유발한다. 이런 현상은 외현적인 강박행동이 나타나지 않지만 생각이 강박증적인 것이다. 경전의 귀절이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고 그것을 어기었을 경우에 심리적 불편감을 유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경전의 위배적 생각이나 행동은 자신을 비판하고 힐난하는 내용으로 작용하여 일종의 강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강박적 관념은 단순히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지 뇌에서는 동일한 효과를 일으켜 불편감을 일으키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이때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적 양심과 관련되어 증상이 유발되는 경우이다. 이제 그에게 양심에서 들려오는 신앙적 목소리로 안도하고 위안하려는 목소리로 안정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대개 안정보다는 오히려 불편감을 증가시킨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게다가 신앙적 강박증상의 강도는 발전되는데, 그 증상은 일단 통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통제는 대개 과도한 것이 특징이다. 즉 순수한 강박사고는 혐오스러울수록 과도한 통제는 불가피해진다.

자신의 신앙적 가치체계에 어긋나는 내용일수록 더욱 그 내용이 혐오스럽고 불편한 것으로 경험되며, 그런 내용일수록 더 과도한 통제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처럼 의례적으로 생각을 억제하려는 노력은 매우 비효과적이어서 생각을 더욱 떨쳐내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침투적인 생각들이 많다는 이유다. 마음의 정결함을 원하는 사람들일수록 조금이라도 불편한 생각이 떠오르면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침투적인 사고로 고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3) 치료적 대응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의 계율이나 경전이 기준이 된다. 신앙의 계율이나 경전에 위배되지 않는 생활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이들의 삶은 이런 신앙적인 것에 철저하게 맞추어져 있다. 여기에 위배되는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갖게 되므로 강박관념을 훨씬 강하게 느끼는 편이다. 이런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적인 특성으로 이해되기 쉬운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병리적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은 그 치료적 대안이 될 것이다.

첫째로 신앙의 획일성을 지양해야 한다. 청교도적 강박증은 엄격성이 특징이다. 이들은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냉혹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자기제약에도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자기제약과 통제는 일종의 방어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좀처럼 이완시키거나 늦추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전형적으로 냉혹하고 삭막하고 각박하며 경직된 도덕성을 나타내곤 한다. 협력적이고 통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의 이면에는 불안정감이 꿈틀거리고 있다. 또 이들은 사회적인 규칙을 위반하여 수치감이나 당혹감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늘 주의하고 경계하며, 개인적 비난이나 조소당하게 될 상황을 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이 취하는 방어적 수단은 매우 협소한 경계 내에 자신의 행동 범위를 제한한다.

이들의 순응적 양심의 이면에는 상당히 주장적이고 타인을 향한 분노감과 비판적인 태도들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적개심은 개인 내부를 휘젓고 있다가 감정이 격정적으로 고조될 때 표면을 뚫고 나오거나, 반복적으로 되씹거나 씁쓸한 자기통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죄책감이나 자기비난도 주기적으로 나타나며, 감정을 내부로 돌려 자신에게 심각한 처벌적 판단과 행위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생성되는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기책망은 한편으로는 적대감과 숨겨진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해소시키려는 욕구를 가진 반면에, 이러한 표현으로 인해 거절과 조소를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역시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양가성의 잔재는 일생을 통해 지속되며 긴장감을 유발하고, 때로는 심인성의 신체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둘째로 욕망이나 충동을 지나치게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청교도적인 강박증은 욕망이나 충동을 지나치게 억압한다. 여기에는 이들이 비난받을 만한 충동이라고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분노감이나 성적 욕망 등도 포함된다. 이들은 충동을 표출하는 대신에 이것들이 결코 풀려나지 않도록 단단히 통제하고,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저항하며, 외부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들은 마치 고행적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생활양식은 내면의 충동이나 억압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이들 청교도적인 강박증은 개인적인 적절성과 공손함을 띤 행위로부터 시작하여 심각한 독단, 끊임없이 타인의 개선을 요구하는 냉혹하고 독선적인 양식, 타인들이 행한 부적절한 행동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방식으로 악화되어간다. 이들은 속으로는 초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에도 이성을 잃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마치 냉혹하고 엄격한 훈육자이기라도 한듯 잘못을 지적하고 도덕적으로 매우 까다롭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그런 신앙적 기준에 위배된다고 생각될 때에는 비난도 서슴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나 비도덕적 행위의 하수인 또는 일종의 가해자로 보이므로, 이들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정당하게 신랄한 비난을 가한다. 이들이 표면상 주창하는 정의와 도덕의 신념은 이들의 분노 표출을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정의는 불의에 대한 처벌적 태도를 발동시키고, 도덕성은 이러한 처벌을 인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청교도적인 강박증은 과거에는 타인의 비난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타인을 비난하는 무자비한 비판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죄책감을 완화시켜야 한다. 죄책감은 생각적인 측면이 강하기에 그 완화하는 생각적인 측면에서 이뤄져야 한다. 즉 사고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어느 남자 대학생은 반복해서 의식을 침투해 들어오는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다” 라는 생각으로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런 생각이 반복해서 떠오른다고 해도 그다지 괴로울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치관과도 상충되는 침투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그 침투적인 생각이 심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야기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아무 때나 불쑥불쑥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때마다 그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거나 죄책감과 불안감을 씻어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머리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면서 속으로 “그만!~ 그만! 안 돼!” 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생각을 억제하려고 할수록 생각은 더욱더 떨쳐버리기 어렵고 자주 떠오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이러한 시도로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이 생각에 대한 강박적인 반추에 빠져들게 되었다.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 시간이 소요되는 엄청난 머리싸움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다’는 생각을 반증하기 위해 계속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이고 하나님은 없다’는 음성과 ‘기독교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실현해가는 하나님 선물’이라는 또 다른 음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이로써 그는 이른바 갑론을박의 논쟁이 내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백과사전과 역사서를 찾아 기독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문제는 죄책감이었다. 어떤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제 그는 죄책감을 완화시켜야 살 수 있다. 그 방법이 신앙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단 완화시켜야만 된다.

3. 결론: 공통적인 두 강박증상

지금까지 우리는 양심적 강박증과 청교도적 강박증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양심적 강박증과 청교도적 강박증은 둘이 모두 지나친 양심을 바탕으로 하여 증상이 유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양심적 강박증에서는 주로 양심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강박적 증상이었다. 그러니까 양심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는 생각만의 작용은 바로 순수하게 심리적 강박증을 시사한다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심리적인 강박증은 외현적인 강박행동이 나타나지 않지만 생각이 강박증적이라는 점에서다. 이때 또 다른 내면의 목소리가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아니야…, 아무도 그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거야. 너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한 거야. 아니야, 아니야…, 순전히 너 때문이야, 네가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면 비겁하게 너만 살아서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야…, 비열한!” 이러한 내면의 ‘전투’는 일단 시작하면 서너 시간 지속되는 것이었다. 앞에서 예를 든 환자의 경우 처음의 목소리는 자신을 비판하고 힐난하는 내용으로, 일종의 강박사고에 해당하는 작용이라는 점에서였다. 이를 위하여 증상의 특징, 심리적 이해, 그리고 치료적 대응을 부차적으로 다루었다.

청교도적 강박증에서는 주로 신앙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강박적 증상이었다. 청교도적 강박증상은 신앙의 근간이 되는 경전이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이 심리적인 측면을 제한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양심적 강박증은 양심이 기준이 되는 것인 반면에 청교도적 강박증은 신앙이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이 둘은 그 기준은 다르지만 현상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이 둘은 모두 사회적이거나 외부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규칙의 위반이라는 것이 더 비중 있게 작용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인의 경우에는 ‘신앙적 양심’이라는 용어의 사용도 가능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