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2년 5월 20일
본문: 로마서 6:1~4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새로운 삶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로마서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죽음으로. . .
요즘 뉴스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이대로 세상이 가도 되는가? 무엇보다 ‘왕따’와 ‘일진’을 보면서 우리 시대와는 다른 완전히 깨어진 관계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적어도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엄연한 구별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근래 들어, 저에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생각입니다.
'복음이 능력이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있네요.
요즘 제일 무서운 게 ‘중딩’이라고 하죠.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중딩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죠.
얼마나 학교가 무서운지 아들이 아침마다 엄마에게 투덜댑니다.
아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요. 오늘은 학교 안 갈래요.
엄마: 그래도 어떻게 학교에 안 가니. 네가 참아야지 빨리 옷 입고 학교 가라.
아들: 엄마 정말 싫어요.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이 너무 힘들게 한단 말이에요.
엄마: 그렇게 약한 소리 하면 안 돼! 네가 선생님인데 안 간다면 어떡하니?

우리가 흔히 기독교를 일컬어 “변화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든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변화의 동기와 방법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고행을 한다든지, 자신의 것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단절과 떠남, 버림을 미덕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본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노력은 점점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누리기보다는 외면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육신의 욕망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성경은 우리의 욕망이 “죄의 세력”과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영적 권세로 말미암아 그 지배하에 있는 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경험합니다.
사실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세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육신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사단은 우리에게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하다가 “기소중지”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의 세력 아래 있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죽음을 이긴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 육신의 욕망이 죽음으로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은혜가 무엇인지 압니다. “은혜”는 한 사람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순종의 길]이라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전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으로 더욱 알려진 사람이죠.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군목으로 이집트에 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재능 있는 사람을, 그렇게 신실한 사람을 하나님이 왜 더 사용하지 않으셨는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에는, 7살의 딸과 아내만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삶을 산 것 같았습니다.
챔버스는 미술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고, 음악도 잘했습니다. 강의도 잘하고 설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아쉬워하고, 그의 위대한 사역을 바라보지만, 사실 그가 그 길을 가기까지 겪어야 했던 영적 고뇌의 시간과 시련은 간과합니다.
[순종의 길]에서 그의 친구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온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리까지 이르는 데는 일반적으로 자신만 아는 숨겨진 배경들이 있습니다. "네!"라는 확답은 순간 또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하지만 그 대답이 있기까지 주님을 떠나 방황하는 기간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믿기는 챔버스의 ‘성령 충만’은 그 친구의 ‘어려움의 기간들’과 연결됩니다.
나는 챔버스가 쉽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그들을 격려하며 바르게 인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계곡의 깊이는 산의 높이와 비례합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삶을 살기로 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이 특별한 삶을 결단하기 위한 가시적인 사건과 의식이 있다면 “세례”였습니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 우리가 영상을 통해 본 곳은 바로 루디아 기념교회입니다.
빌립보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루디아 기념교회'는 바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 마당 아래에는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세례 터가 있습니다. 루디아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6장 11-1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사도 바울의 삶이 참 행복했던 것은 늘 좋은 동역자들을 만났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아 강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강가에 모인 여자들의 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쨌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여자들인 것 같습니다.
14절의 말씀을 유추해 보건대, 그 여자들의 모임은 유대인 공동체였던 것 같고요. 사도 바울이 늘 그랬듯이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죠. 그 중의 하나였던 ‘루디아’가 믿음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말씀을 듣지만, 모두가 반응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요.

마태복음 9장 9-13절을 대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라바지오의 ‘마태를 부르심’이란 그림을 보면 그 장면을 의미 있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마태를 부르시던 현장에 여러 명의 세리가 있습니다. 오른 쪽 끝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얼른 돈을 숨기고 있고, 중간의 한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자신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 카라바지오, The calling of st. Matthew(마태를 부르심), 1606.

그림에 빛이 비치는 한 사람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관심할 때 한 사람이 그 부르심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결국 마태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따라가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공생애를 지나고 결국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지요.

오로지 많은 여인 가운데 루디아만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루디아의 직업이 ‘자색 옷감 장사’라고 되어 있는데, 두아디라라는 지역이 옷감으로 유명했고, 루디아는 아마도 무역을 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여장부”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상상할 수 있죠. 그녀가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영향력으로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울을 초청해 집에 있게 하지요.
사도행전 11장 15절을 보세요.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의식에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은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세례를 받고 계속해서 옷감장사를 하는 사람이지만, 삶의 목적이 달라졌고 사도 바울과 믿음의 동역자가 되고,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 루디아의 이름이 사도 바울을 돕는 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루디아의 삶을 바꿔 놓았을까요?

영원한 갈등, 죄와 은혜!
루디아의 삶을 변화시킨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녀가 이미 유대인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니까, 이전에 믿었던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되지 않았던 무엇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율법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보려고 했지만, 끝없이 찾아오는 좌절감과 죄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죄책감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실험을 해볼까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듣고 잘 따라 해 보세요.
절대로 이 시간 신 것을 먹었다거나, 먹는다거나 하는 것들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레몬을 먹었을 때 침이 솟아오르는 상상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한겨울에 차가운 귤을 먹었을 때의 치아의 얼얼함과 새콤함에 절대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입에 침이 고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죄지은 사람?”

혹시 여러분 가운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잘못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에 분노가 차오르고, 상처가 더 깊어집니다. 용서하려고 결심하는데 오히려 괴롭기만 합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놈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의 신앙과 열심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낙망하게 하지요. 그런데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들은 복음이 무엇이냐면, 자신 스스로 열심히 의에 이르려는 노력을 버리고,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으면, 이제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능력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의로운 사람일수록 자랑할 거리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자랑거리가 커지는 것이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데 무슨 자랑을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할 뿐입니다.
참 신기한 신앙의 진리는 나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로아니고, 얻을 수도 없는데,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나면 내 삶에 새로운 노력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받은 자로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떠들썩한 사건 중의 하나가 호텔에서 놀음하다 걸린 스님들의 이야기죠. 특히 그 사람 중에는 “실천 승가회”라는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있었죠. 세상을 바르게 살자고 앞에서 데모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제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선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선한 결과가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수없이 올바로 살아보자고 다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적해 봐도 내 속에 선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거듭난 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코, 우리의 행위로 의로움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쉽게 고백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의 과정을 보지 않고, 은혜의 결과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은혜는 누군가 그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2002년 개봉한 덴젤 워싱톤이 주연한 “존 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인 존 큐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하다 쓰러진 아들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보험회사에 속아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심장 이식수술을 받아야만 사는 아들. 돈도 구할 수 없고, 보험도 적용이 안 되는 상황에서 병원은 아이가 조용히 죽는 수밖에 없다고 퇴원하라고 합니다.
결국, 최후의 방법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병원 응급실을 점거한 채 인질을 잡고는 아들을 수술시켜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심장에 구멍이 난 아들은 점점 죽어가는 상황이고, 아들에게 맞는 심장을 이식받는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인질로 잡혀있는 의사를 설득하고 협박합니다. 자신이 자살을 할 테니 자신의 심장을 아들에게 이식시켜 달라고.
모든 수술 준비를 하고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아들을 살릴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노력을 아들을 알지 못합니다. 아들은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결국, 아들이 기적적으로 수술을 받고 살게 됩니다. 아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수술비를 지불할 능력도 없습니다. 심장을 구하려고 애타게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은 수술 대위에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결코, 살아난 아들이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얼마나 애타게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는지 말입니다.

“은혜”라는 이름을 교회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너무나 쉽게 다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결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죄에 대하여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저리고 사무치는 은혜인지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 죄를 짓고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가슴 절절한 은혜를 배워나가야 하지요.

오늘 본문 1절이 이해가 되시나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아니요, 진정한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은 죄와 함께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죄를 짓고,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바로 그런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를 받는다는 가장 강력한 의미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 부활의 역사가 없는 것처럼, 죄에 대하여 죽지 않는 한,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래 세례는 손으로 물을 떠서 행하는 ‘수세’가 아니라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가 전통적으로 맞습니다. 단지 기독교의 전통이 수세로 내려오게 된 것은 박해시대에 세례를 받는 것, 혹은 침례가 여의치 않은 곳에서 세례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지요. 물속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 즉 죽음의 위협을 경험한 사람들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봅니다. 죽을 뻔 해봐야 삶을 알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어보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것이 은혜라는 것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이제는 죄 가운데 거하지 않는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세례가 무엇인가요?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경험한 은혜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은혜 받은 자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11절에 보면 “죄에 대해 죽었다!”라는 표현이 무려 10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제는 죄와 연관성이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관된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몸이 아프고 열이 나서 아프면, 하고 싶을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옛날에는 복숭아 깡통이나 파인애플 깡통이 얼마나 귀했습니까? 아프면 먹을 수 있습니다. 아프면 웬만한 잘못도 용서를 받습니다. 그것이 너무 행복해서 “매일 아파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자동차를 사면 보험에 듭니다.
제가 미국에 있던 시절, 두 번의 차 사고가 났는데 보험처리가 얼마나 잘됐는지, 게다가 차를 고치고 났더니 돈이 남았습니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그래서 자동차 보험에 들고 나서 사고가 나면 좋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몸이 아파도 위로하는 사랑을 경험하고, 자동차 사고가 나도 보험처리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이 좋다고 아프거나 사고 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정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피부에 박힌 가시 쉽게 빼는 법> 피부에 가시가 깊이 박혔을 때 부추를 짓이겨 3, 4회 정도 환부에 갈아 붙여주면 가시가 뾰족이 솟아올라 쉽게 뺄 수 있다고 합니다. 흔히 바늘 등 날카로운 기구를 사용해서 가시를 빼내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때 아픔을 덜 느끼게 하려면 얼음조각을 올려놓았다가 신경이 마비된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런 댓글이 달렸네요.
하하~ 재미있네요. 그런데 한 번 실험을 해보려고 일부러 가시에 찔리려니 잘 안 찔려지네요. 혜경님의 말씀이니 그냥 믿을께요! (* ^_^)>―-★

죄를 이기는 권세!
본문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가 가지는 놀라운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죄의 본성이 강합니까? 아니면 선한 본성이 강합니까?"
우리 인간은 본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죄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속성에 물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는 순간, 죄의 능력이 우리를 지배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더는 나에게 죄의 본성이 있어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는 것, 죄에 대해 수 없이 패배했던 패배감으로 낙심케 하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예전에 나왔던 찬양이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 무엇이 자리 잡고 있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가 변화된 것입니다.
루디아가 세례를 받고 즉시 사도 바울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 온 집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첫 복음이 전파되도록 빌립보에 교회를 세웁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사업을 통해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후원하는 일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왜 돈을 버는지, 왜 사업에 성공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자식 자랑을 하겠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치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 공부하는 것이 대견합니다. 미국에서 꽤 괜찮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첫 학기에 4.0 만점을 맞고는 무척 기뻐합니다. 지금 공부하려는 것은 Business입니다. 그런데 목표는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학교 교수들이, 주변 사람들이 묻는 답니다.
너는 왜 목사가 되려고 하니? 공부하는 것으로나 성격으로나 Business를 하면 잘할 것 같은데.
그런데 아들이 공부하는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한 준비입니다. 다른 것을 해도 잘할 것 같은 사람이, 그것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사람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본성을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나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전에 함께 놀던 여인이 다시 유혹을 합니다. 어거스틴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너는 너로되 나는 내가 아니로다.”
"너는 이전의 너나 지금의 너나 똑같은 너지만, 지금의 나는 네가 이전에 알던 그 어거스틴이 아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 훌륭한 목사님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한 일이 부고장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친구와 친지에게 '김익두 사망!' 이전에 깡패 두목이었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나는 새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죄에 대해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의 본질은 의인이다. 성자다. 거룩하다.」
사단의 올무에 걸려들어서 지속해서 괴로움을 당하던 그 시대는 끝났습니다. 새로운 시대, 은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영광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승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겨놓은 영적 싸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런 싸움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5장 4절의 말씀입니다.

이미 죽음을 경험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가 더는 우리를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멋지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겨놓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단 권세가 우리를 침범해도 우리가 선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세례에 대하여 말했을 때는 단지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변화와 온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더는 세상에서 패배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담대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나갔으면 좋겠습니다.